기사입력 2009.01.23 10:29 / 기사수정 2009.01.23 10:29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김소식, 자신의 해설철학을 말하다
Q : 이후 '해설위원'으로써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내셨고, 오랫동안 정확한 해설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해설, 이만큼만 하면 김소식만큼 한다'라는 비결이 있다면요?
김소식(이하 ‘김’으로 표기) : 사실 야구해설은 프로스펙스 영업의 수단이자 일환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스포츠 브랜드 영업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자나 PD들과의 친분도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박홍수씨가 고교 야구 해설을 제의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야구 해설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해설위원들이 1982년도에 해설을 시작한 것에 비해 저는 1983년부터 시작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많은 애로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야구를 그만둔지가 오랬기 때문에 선수들을 잘 몰랐고, 전년도 해설 실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만의 특기를 찾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존의 해설 위원들과는 다른, 어떻게 경쟁력을 가져가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해설위원들이 모두 야수 출신인데 비해 저만 유일하게 투수 출신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기존의 해설위원들이 현역시절에 9회 말 투 아웃 만루에 단 한 번이라도 마운드에 등판한 적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전 경험을 가진 선수는 제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투수였으니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투수로 은퇴했습니다. 이러한 실전 경험이 저에게는 큰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투수 부문을 집중 분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해설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즉, 투수 손에서 볼이 떨어지는 순간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확률’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어율이 좋되, 피안타율이 높은 마무리 투수가 등판했을 경우 ‘저 선수는 볼카운트 1-1에서 피안타율이 얼마이며, 2-3일때 실점률이 몇%’라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마무리 투수는 땅볼 투수가 아닌 삼진을 잡아내는 능력이 좋은 선수’여야 함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해 줍니다. 이러한 노력은 기록이 바탕이 되어야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야구 기록의 대가’라고 하는 차재옥씨(前 한국야구 기록 연구회 회원)를 고용하여 월급 주고 기록 분석에만 전념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 김소식 해설위원은 ‘해설에 대한 철학’에 대해 매우 상세히 자신의 견해를 표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볼카운트 1-1에서 '커브를 던져야 한다‘든지 ’빠른볼을 던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50:50‘ 확률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설(육감해설)은 아마추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설에도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투수가 난타를 당하여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온다면 어떠한 대화가 오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줄 점수는 줘라' 라든지 '긴장을 풀어라' 등 마치 마운드에 오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독들은 절대 ‘줄 점수는 그냥 줘’라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막으라’는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최소 점수로 막아라’ 하고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마시절 추억이 하나 있는데…… 제가 선발로 등판했던 경기에서 “플레이 볼” 하는 순간 1회에 스트라이크 하나 못 던지고 볼만 16개를 던져 밀어내기로 1점을 허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감독님께서 ‘김소식이 볼이 가장 좋다’는 선수들의 평가를 믿고 저를 선발등판 시켰지만,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섰던 것 같았어요. 그때 감독님께서 ‘타임’을 부르고 저에게 하셨던 말이 있었어요. “너 오늘 점심 뭐 먹었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밥하고 국, 김치 먹었어요”라고 답했더니, 감독님께서는 “그것만 먹은 것도 아니잖아. 너 김도 먹고 깻잎도 맛있다면서 같이 먹었잖아.”라고 말씀하시니까 저 역시 기억이 나더군요.
이렇게 몇 말씀 하시더니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셨어요. 즉, 제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이었죠. 감독님 덕분인지 밀어내기 점수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었습니다. 즉, 마운드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에 대한 예측도 이런 경험적인 요소가 해설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김소식, 한국야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하다
Q : 마지막으로 프로야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돔구장 건설, 인프라 구축, 선수들의 도덕적 해이 제거, 학원스포츠 개선 등 많은 부분이 있는데, 한국프로야구가 제 2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 제가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학원스포츠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야구나 축구를 비롯하여 농구, 배구 등 인기종목 스포츠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축구협회 주관으로 ‘학생은 교실로 돌아가자’는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 제목에서처럼 학생의 본분은 학업에 있습니다. 운동선수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자신들의 아들/딸이 모두 박찬호, 이승엽, 박세리, 김연아 같은 선수가 되기를 학수고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척박한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적인 선수들입니다. 따라서 본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즉, 야구 끝나고 난 이후의 인생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아무리 프로야구 선수로 성공한다 해도 30대 후반이면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합니다. 더구나 의학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도 연장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은퇴 순간이 인생의 3분의 2가 남은 시점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감독을 한다고 해도 감독/코치직이 끝나는 순간 후배 선수들이 은퇴하여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다면 다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결국 체육계는 체력이 바닥나면 끝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체육계는 체육 아니면 갈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들어 큰 이슈가 된 KBO 총재 선임이나 대한야구협회장 선임문제도 그렇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만큼, 나이를 떠나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체제 구축이 가능한 인사가 KBO 총재나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누구보다고 야구에 대한 조예가 깊고,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추대되어야 ‘탁상공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KBO는 아마야구에 15억을 지원하는, 아마야구의 대주주입니다. 따라서 총재가 아마추어 야구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구 선진국이라고 하는 메이저리그를 예로 들어 봅시다. 메이저리그는 자신들의 도덕성에 상처를 받을 경우 ‘재판관’을 커미셔너(총재)로 추대하기도 하고, 흥행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전문 경영인’을 커미셔너로 추대하기도 합니다. 즉, 전문성을 따라 추대되는 커미셔너의 성격도 수시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KBO의 경우는 이와는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이룩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낙후된 구장 시설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돔구장 건립이라든지, 아니면 경인권과 충청권 중앙에 위치한 천안에 야구장을 짓는다는지 하는 문제는 모두 총재가 해결해야 합니다.
인프라 구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임 총재께서 안산 돔구장 건립을 이야기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지금은 안산에 야구장 건립할 때가 아닙니다. 무릇 야구장을 포함하여 축구장도 문화행사 같은 각종 이벤트를 개최하게 하여 1년 365일도 모자르게 해야 합니다. 즉, 이런 점을 예측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닌, 야구계가 원하는 순수 민간 인사가 총재나 협회장으로 선임되어야 합니다.
의학과 접목한 야구 기본 이론 연구도 필요합니다. 왜 7~11세의 어린 선수들에게 변화구를 던지게 하면 안 되는지, 또한 17~18세 까지 왜 허리에 무리를 주어서는 안 되는지(특히 포수)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유망한 어린 선수들이 많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투구를 함에 있어서도 초기에 숨을 내쉬고, 투구동작을 하는 동안 숨을 참고, 던지는 순간 숨을 한꺼번에 내쉬면서 공 끝에 집중하는 연습도 ‘의학’에서 미세한 부분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2002년 월드컵 당시 축구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9시 뉴스를 장식하는 것을 보고 저는 ‘야구 유니폼은 언제쯤 9시 뉴스 메인에 나올까’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베이징 올림픽을 통하여 실현되지 않았습니까(야구 금메달)? 그런데 저는 2002년 월드컵 때에도 그러했듯 이번 올림픽 역시 ‘지나간 행사’로 끝나게 되는 것 같아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이슈들을 바탕으로 획기적인 한국 야구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김소식은 누구?
1960년대 아마야구를 이끈 '정통파 우완 투수'로써, 부산중학교 - 부산고등학교를 거쳐 상업은행, 해병대 야구단을 이끌었다. 에이스 중의 에이스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정통파 우완 투수로써는 전혀 손색이 없는 투구폼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스로써 팀을 이끌던 그였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27세) 하고 본격적으로 은행원으로써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장태영 상업은행 감독은 '너는 내 뒤를 이어야 한다'면서 끝까지 김소식의 은퇴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후 왕성한 사회활동에 성공하면서 '학원스포츠계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상업은행, 제일은행, 국제그룹 내 조광무역 자재차장, 국제종합기계 관리부장을 거쳐 프로스펙스 영업부장을 실시하면서 야구선수에 이은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1983년에 야구해설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고, 이것을 계기로 22년간 공중파 TV MBC, KBS, SBS 프로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텔레비전 야구해설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KBO 규칙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으로써 한국야구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엑's 이슈
주간 인기 기사
화보
통합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