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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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판에 불어닥친 '사인 알려주기'에 대한 단상

기사입력 2008.12.01 12:16 / 기사수정 2008.12.01 12:16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1982년 프로야구 원년시절에 다음과 같은 비화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타격부진으로 고민하던 한 선수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만수 선수(당시 삼성)에게 "만수야, 오늘 하나만 치기 좋은 공 다오"라고 그랬더니 이만수 또한 "그래 오늘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좋은 것 하나 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투수와 사인을 교환한 이만수가 '직구'라고 알려주자 직구를 의식하여 방망이를 휘두르자 커브볼이 뚝 하고 떨어졌다고 한다. 성을 낸 그 선수가 이만수에게 친구를 놀리냐고 따지자 이만수 포수가 했던 말이 걸작이었다고 한다.

"야, 그럼 내가 우리 투수 죽이면서 네가 달라는 대로 좋은 공 줄 줄 알았더냐?"

결국, 그 선수는 3구째 만에 투수 땅볼로 물러났다고 한다.

꾀와 꾀

허구연 해설위원은 당시 상황을 일컬어 '프로야구에서 안방 살림을 맡고 있는 포수가 상대 타자에게 자기 팀의 투수가 어떤 공을 던져줄지 일러바치는 것은 이적행위'라고 평가하신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인교환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였으며, 그것도 경기 승패가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에야 위와 같은 사례가 가능했다.


▲ 이만수 코치(SK)는 현역 시절, 투수리드를 비롯하여 타자들과의 머리싸움에도 능했다.

요즘 같은 때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면, 포수가 '빠른 볼로 준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타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빠른 볼을 기다리는 척하며 변화구를 대비할 수도 있으며, 포수는 그러한 타자의 습성을 파악하여 투수로 하여금 정말로 빠른 볼을 던지게 하는, 허를 찌를 수도 있다. 그만큼 야구는 머리를 써야 하는 경기다.

'사인 훔쳐보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전술 중 하나다. 손자병법에서도 '남을 알고 나를 알아야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한 것처럼, 2루 주자가 포수의 사인을 읽고 벤치에 알려 줄 수도 있고, 이를 알아챈 베터리와 벤치는 사인을 바꿈으로써 상대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요즘은 일부러 상대팀에 대놓고 사인을 보여 주는 사례도 있다. 자신들의 거짓 사인을 노출함으로써 상대방의 허를 찌른다는, 머리싸움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야구 경기를 하는 코칭스태프, 선수들은 보통 하루에 세 번 정도 사인을 바꾼다고 한다. 사인을 한 번도 바꾸지 않는 경기도 있지만, 상대방의 머리싸움에 대응하기 위한 사인 교체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바뀐 사인을 다시 역이용하는 것 또한 벤치싸움의 일환이다.

결국, 이러한 벤치에서의 머리싸움이 큰 전제가 되어야 세부적인 ‘전투기술’로써 타격과 배팅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코칭스태프는 전술의 대가가 되어야 하고, 선수들은 전투기술(배팅, 피칭, 필딩)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

머리싸움과 자발적 이적행위

이렇듯 상대방의 전술을 알아채는 것은 상대방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100% 벤치의 머리싸움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즉, 최근 축구계에서 불거져 나온 승부조작이나 김재박 LG 감독이 제기한 사인 알려주기의 관행은 자발적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소속팀에 대한 이적행위다. 물론 아직 KBO에서는 사인 알려주기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선수는 '김 감독의 말이 맞다'고 긍정한다.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 선수들간 사인 교환에 먼저 입을 연 김재박 LG 감독

일부 언론에서는 몇몇 선수들의 이니셜을 제시하며, 사인 거래에 대한 몇몇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사인 교환이라는 테마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일부 선수들 간에는 암묵적으로 많은 거래가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특히, FA를 코앞에 둔 선수들이 괄목할 만한 성적을 기록하는 것을 비롯한 몇몇 의심스러운 사례는 정직하게 운동만 해 온 선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런 사례가 발생할 경우 커미셔너(총재)가 나서기 전에 선수협의회가 자체 징계에 들어간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하여 선수들끼리 담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만약에 국내 프로야구 선수협회가 이러한 관행을 알고도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라는 명목으로 입 다물고 있었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다. 왜냐하면, 선수협회 차원에서 사인 교환이라는 것 자체를 담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과 성적이 부진한 선수들의 몸값을 끌어올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치부를 드러내어 좋은 약으로 삼기를

부끄러운 점이 드러났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약으로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러한 치부를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하여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옛말에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면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했다.

따라서 KBO와 선수협회는 사인 알려주기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더불어서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해야 한다. 썩은 싹을 잘라내야 식물이 성장하는 법이다. 모쪼록 본 사건을 계기로 한국 프로스포츠계의 썩어 문드러진 관행이 바로 잡히는 초석이 되기를 기원한다.

[사진 =이만수 코치 (C) SK와이번스 구단 제공, 김재박 감독 (C) LG트윈스 구단 제공]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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