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10 19:57
스포츠

[인물로 본 프로야구] 5. 최고의 옆구리 투수, 라이온킹 박충식

기사입력 2005.02.21 09:30 / 기사수정 2005.02.21 09:30

김광수 기자
 

정말 대단했다. 막강 타선은 아니었지만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었던 해태의 타선을 24살의 신인이 싱커로 잠재웠다. 더군다나 당시 시즌 최저 방어율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투수 선동열 선수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심장을 선보인 것이다. 만약 삼성 타자들의 방망이가 연장 15회까지 허공을 가르지만 않았더라면 번번이 해태의 수비수들에게 걸려 무승부로 끝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프로야구의 명승부를 꼽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그 중심에 있었던 90년대 최고의 옆구리 투수 박충식 선수를 소개한다.


이종범에 밀려 삼성에 입단하다


아시다시피 박충식 선수는 광주상고를 나온 광주출신의 선수였다. 아마야구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당장 프로에서도 통할 것으로 평가받던 그였다. 하지만 93년 1차 지명에서 연고지 팀이었던 해태가 국가대표 유격수 이종범 선수를 지명했고 고향은 아니지만 전라도 연고지 팀이었던 쌍방울마저도 언더핸드 투수 성영재 선수를 지명하고 만다. 그는 결국 빼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2차 지명으로 밀리게 말았다. 바꿔말하자만 당시 이 세 선수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했던 해태와 쌍방울의 고충 또한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만약 쌍방울이 이종범 선수를 지명하고 박충식 선수가 해태로 성영재 선수가 삼성으로 지명이 되었다면 당시 프로야구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2차 지명으로 밀린 그는 김성길, 신경식 두 선수를 쌍방울에 트레이드하여 얻은 2차 상위 지명권을 보유한 삼성에 입단하게 된다. 수많은 신인선수 농사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삼성이 모험이라면 모험일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후에는 탁월한 선택임을 증명하게 된다.


한국시리즈 15회 완투, 일약 전국구로 거듭나다


앞서 언급했듯이 93년은 삼성에게 정말 대단한 한 해였다. 그때처럼 신구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삼성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없었다고 자부한다. 

개막전부터 김상엽-김태한 선수에 이어 3선발로 낙점이 된 박충식이 아마 때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강력한 원-투-쓰리 펀치를 형성한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그의 완투 능력이었는데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7완투 2완봉으로 마치 김시진 선수와 같은 데뷔 초 강력한 완투형 투수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맞이한 한국시리즈 3차전. 비록 에이스인 김상엽 선수가 첫 경기를 내줬지만 2차전에서 김태한 선수가 그 때까지 단 6명뿐이었던 한국시리즈 완봉승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덕분에 삼성은 당초 목표였던 1승 1패를 달성하고 대구에서 3차전을 맡게 된다. 당연히 3차전은 3선발인 박충식 선수의 선발 등판이었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강한 문희수 선수가 선발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강심장” 박충식 선수의 신화가 시작된다.

해태는 6회 1-1 동점 상황에서 당시 구원과 방어율 신기록을 세운 선동열 선수를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다. 아마 신인 선수가 최고의 선수와 맞붙으며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노린 수로 보였다. 하지만 박충식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여전히 구위는 대단했고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싱커의 위력은 더해져만 갔다. 7회들어서는 반대로 선동열 선수가 1점을 내주며 2-1 패전의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박충식 선수 역시 8회초 한 점을 내주고 2-2 상황에서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10회초 투구수가 100개가 넘긴 선동열 선수 대신 '마당쇠' 송유석 선수가 투입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삼성 마운드는 박충식 선수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난 한국시리즈 3차전 2-2 무승부. 결국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팽팽했던 경기는 끝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고 사상 초유의 한국시리즈 15회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경기를 통해 박충식은 일약 전국구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그는 이 경기의 후유증 탓인지 다음 등판한 경기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만다. 그리고 팀 또한 그해의 한국시리즈를 해태에게 내주고 만다.


혹자들은 구단에서 강요한 한국시리즈 15회 완투가 그의 선수생활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해의 스탯을 보더라도 그 경기가 박충식 선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당시 믿을만한 투수가 없었던 삼성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본인의 강한 승부 근성이 자신을 마운드에 서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 수차례 권영호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었고 그 때마다 권 코치는 몇 마디 던지고는 그대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때의 권 코치의 심정과 팬들의 심정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내려오지 않고 승리를 따내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 경기는 그에게 실보다는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득이 더 컸을 것이다.



2부에서...

사진출처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
                1995년 삼성라이온즈 팬북 사진 스캔 



김광수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

주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