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7.29 05:57 / 기사수정 2008.07.29 05:57
Sports Essay - 피겨 소녀, 소년들을 아십니까?
[엑스포츠 뉴스=조영준 기자] 필자가 자주 찾은 실내 놀이공원이 있었습니다. 그 놀이공원에는 큰 실내아이스 링크장이 있었죠. 그곳은 스케이트를 타려는 입장객들이 너도 나도 스케이트를 타고선 링크를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중심에서 피겨 연습을 하는 어린아이 몇 명의 모습이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올려 양손으로 잡는 모습은 너무도 앙증맞고 깜찍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아이스 링크 위에서 점프를 뛰고 빙빙 도는 스핀 연기를 하려하는 아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연아(18, 군포 수리고)의 등장으로 인해 이 땅의 피겨는 비로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피겨에 대한 선망이 강했던 평범한 주부가 주변에 있던 링크 장에 자신의 어린 딸을 데리고 간 이후로 10여년이 흐른 뒤 한국피겨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연아란 최고의 스포츠스타가 배출되었다고 해서 한국피겨의 위상과 저변이 순식간에 좋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김연아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안 감춰져있었던 한국피겨의 열악함이 고스란히 나타났습니다.
일선에서 어린 유망주들을 지도하고 있는 코치 분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한국피겨의 환경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불만도 있지만 감사해야할 것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이죠.
물론 어린 유망주들을 언론에 소개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현실에 대한 한탄을 맘껏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김연아가 출연한 이후로 그 ‘이전’과 ‘이후’의 인식이 바뀐 것이 사실일지는 몰라도 김연아가 거쳐 왔던 험난한 길은 이제 유망주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6시간에서 많게는 8시간 정도의 연습을 소화해내는 이들 선수의 연령은 10대 초반에서 중반입니다. 한참 호기심 많고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나이에 이 선수들은 매일 피겨를 품에 안고 추운 링크 장에서 들어서서 하루의 대부분은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인가에 전문적으로 몰두하면 당연히 나머지 시간과 경험을 포기해야하는 희생이 뒤따르게 됩니다. 특히나 운동선수들이 그러한데 피겨란 종목을 살펴보면 상당히 고독하면서도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해야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스케이팅 종목 중에서 피겨는 안전한 축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피겨와 관련된 기술들을 계속 익혀나가면서 몸이 성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피겨는 부상이 많은 종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피겨의 ‘꽃’으로 불리는 ‘점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처음엔 한바퀴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반, 두 바퀴, 두 바퀴 반, 세 바퀴 순으로 점차 회전수를 추가해 나갑니다. 이 점프를 거듭 돌면서 무릎과 발목 등에 이상이 오고 여러 가지 잔부상도 겹치게 됩니다.
점프에 특별한 소질이 있는 선수들은 어린나이에 ‘더블 악셀’을 익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대 초반에 트리플 점프 5종 세트(살코, 토룹, 룹, 플립, 러츠)를 다 완성하고 이것을 성인무대에 들어서기 전에 트리플-더블, 혹은 트리플-트리플의 콤비네이션 점프로 완성하는 선수들이 세계 정상의 무대에 설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김연아는 이러한 과정을 충실하게 걸어온 선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내의 피겨 소년, 소녀들 중에서 김연아의 이러한 성장에 근접하거나 거의 동일하게 발전해나가는 선수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12세에 불과한 이동원(12, 과천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더블 악셀을 성공시켰고 만 11세에 이르자 트리플 5종 점프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피겨를 타는 끼와 놀라운 체력은 피겨관계자들과 지도자들을 경악시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8 슬로베니아 트리글라프 노비스(만13세 미만)대회에서 우승한 윤예지(14, 과천중)는 정상급 시니어선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유연한 스핀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이번 캐나다 토론토 전지훈련의 성과에 힘입어 네 가지의 트리플 점프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예지의 라이벌인 곽민정(14, 평촌중)은 살코, 토룹, 러츠 등의 점프를 정석적으로 구사하며 현재 교정 중인 플립 점프만 완성시키고 룹 점프를 익힌다면 비로소 ‘트리플 5종 세트’를 장착한 선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것도 곽민정의 앞날을 밝게 해주고 있습니다.
단지 이 선수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곽민정과 윤예지를 위협하는 또 한 명의 라이벌인 김현정(16, 군포수리고)이 있고 남자피겨에서는 최근에 급성장한 김민석(15, 불암고)이 있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김연아에게 환호할 때, 그 뒤편에서는 이러한 축복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작년만하더라도 ‘한국 피겨의 모든 것은 김연아일 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김연아와는 별도로 뛰어난 기량과 잠재력을 갖춘 유망주들이 대거 출연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을 위해 항상 바늘과 실같이 따라다니며 매니저와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피겨 맘’들은 이른 아침에서부터 늦은 새벽까지 아직도 어리기만 한 자녀들을 차에 태우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생활이 고달프지 않으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또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피겨를 하는 집안은 다 똑같이 힘든데 우리만 힘들다고 할 순 없죠.”
이제 한국피겨가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의 현주소를 확인하려면 이 유망주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으로 한참 뜨거울 시기인 다음달 5일과 6일에 주니어 그랑프리대회에 참가할 선수들을 뽑는 선발전이 열립니다.
황무지에 핀 한 송이의 꽃도 그렇게 값지다고 하는데 김연아에게 열광하고 있는 순간, 한국피겨에 희망이 되어줄 새싹들은 무럭무럭 성장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렇게 인재가 배출되고 있는 피겨는 더 이상 ‘변방’의 종목이 아니고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할 ‘전략 종목’으로 거듭나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야 할 부분은 유망주들의 지원 육성책일 것입니다.
[조영준의 엑츠 모닝와이드 - Sports Essay : 스포츠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은 새로운 형식의 기사.]
[사진 = (위)서민석, 김혜린, 김해진, 이호정, 곽민정, 김민석 (아래) 곽민정 (C) 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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