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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용병술로 '원정 무실점' 이끈 퍼거슨

기사입력 2008.04.02 09:06 / 기사수정 2008.04.02 09:06

박형진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형진 기자] 진 팀에게는 '핑곗거리'가 있지만, 이긴 팀에게는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한국시간 기준)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전 AS 로마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경기 역시 승자 맨유의 '비결'이 돋보인 한 판이었습니다.

로마전 맨유의 스쿼드에서 특이할 점은 다름 아닌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었습니다. 긱스가 지난 아스톤 빌라전에서 거의 풀타임을 뛰었고, 나니가 부상으로 원정길에 오른 상황에서 박지성의 선발 출장 확률은 다른 때보다 높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한 후 단 한 번도 그를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선발로 내보낸 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의외의' 선발 출장이었던 셈이죠.

박지성을 출전시킨 퍼거슨 감독의 의도는 금세 드러났습니다. 박지성은 적극적인 돌파 대신 윙백인 웨스 브라운의 수비를 돕는 역할에 치중했습니다. 박지성의 역할은 맨유와 리옹의 1차전에서 리옹의 클레르가 맡았던 역할과 유사했습니다. 클레르는 원래 측면 수비수이지만 이 경기에만 공격적인 위치에 배치되었고, 맨유의 강한 측면 공격을 2선에서 차단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클레르를 전진배치했던 '적'의 전술을 교훈 삼아 박지성을 선발 출장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맨유에 '의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중앙 수비수인 비디치가 착지 과정 중 무릎이 뒤틀리며 경기를 뛰지 못하게 된 것이죠. 비디치의 공백이 생기자 맨유는 서둘러 '만능 멀티맨' 오셔를 준비시킵니다. 모두 중앙 수비 경험이 적은 오셔를 오른쪽 측면에 배치하고 브라운을 중앙으로 옮기리라 예상했지만, 퍼거슨 감독은 브라운을 제 위치에 두고 오셔를 중앙 수비에 위치시켰습니다.

퍼거슨 감독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로마의 중앙 공격보다는 측면 공격이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하고, 수비 경험이 풍부한 브라운을 계속 측면에 둔 것입니다. 이미 4차례나 맞붙은 바 있는 로마의 전력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퍼거슨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깜짝' 용병술이었습니다.

비디치 대신 오셔가 들어간 맨유의 수비진은 확실히 중량감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호날두의 '백어택 헤딩슛'으로 한 골을 실점한 후 로마가 거칠게 나오자 맨유의 수비는 전보다 많은 공격을 허용했고요. 후반 초반 10분은 로마가 공격을 주도하며 거세게 밀어붙이는 형국이었습니다. 반 데 사르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한 골 정도는 허용할 수 있는 수세적 상황이었죠.

그러자 퍼거슨 감독은 평소보다 일찍 교체 타이밍을 가져갑니다.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안데르손을 과감하게 빼고, 하그리브스를 투입한 것이죠. 표면적으로는 포지션 변화없는 중앙 미드필더의 교체였지만, 사실 하그리브스가 투입되면서 맨유는 포메이션을 바꾸었습니다. 4-3-3에서 4-4-2로의 변형이었죠.

통상적으로 4-4-2는 4-3-3보다 공격적인 포메이션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어떤 선수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측면 공격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던 퍼거슨 감독은 하그리브스를 투입하면서 그를 오른쪽 미드필더 위치에 둡니다. 박지성은 왼쪽 미드필더로 이동했고요. 박지성이 수행했던 역할과 마찬가지로, 하그리브스 역시 브라운과 함께 로마의 측면 공격을 봉쇄하는 수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실상 6명의 선수가 함께 수비를 하면서 호날두와 루니의 역습을 노리는 전술이었죠.

이 전술은 로마의 공격을 차단하는데도 유용했지만, 맨유 공격의 핵심인 루니와 호날두의 체력 안배를 위해서도 유용했습니다. 두 선수는 수비 가담에 대한 부담을 덜면서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고, 역습 상황이 되었을 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공격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결국, 이 전술은 한 골을 만들어냅니다. 역습 상황에서 공격에 깊숙이 가담한 박지성의 헤딩 패스를 받은 루니의 골이 그것이죠. 루니의 침착함, 박지성의 활동량이 돋보이는 골이었지만 우선 퍼거슨 감독의 기막힌 전술 없이는 나올 수 없던 골이었습니다.

홈에서 두 골을 실점한 로마는 완전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측면 공격을 살리기 위해 시시뉴, 지울리, 에스포지토를 투입했지만 잠그기를 시작한 맨유 수비를 뚫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홈에서 2골을 헌납한 로마는 득점 없이 이 날 경기를 마무리했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의 꿈도 상당부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호날두의 탁월한 골감각, 박지성의 활동력, 루니의 엄청난 수비가담과 골결정력.. 이 모든 것이 골로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퍼거슨 감독의 경이로운 '지략'이 있었습니다. 박지성의 활약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맨유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퍼거슨 감독의 전술 때문은 아닐까요?



박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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