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구대성, 이승엽, 박찬호, 그리고 이대호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팀으로 알려진 일본프로야구(NPB) 퍼시픽리그 오릭스 버팔로스는 인기가 높은 팀은 아니다. 일본 제 2의 도시 오사카를 홈으로 사용하지만 같은 연고팀인 한신 타이거즈에 인기에서 밀린다는 평이다.
일본 관서(関西) 지방과 오사카(大阪) 출신 현지인에게 “당신은 어떤 야구팀을 좋아합니까”라고 물으면 100에 99는 "한신 타이거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실제 체감 인기에서 오릭스를 좋아하는 팬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오릭스의 떨어지는 인기는 한신의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 수차례 우승(일본시리즈 4회, 퍼시픽리그 12회)과 1995년 고베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 당시 구호 캠페인을 앞세워 연고지 팬들에게 꿈을 실어주는 등 인기 구단의 가도를 달린 적도 있었다.
혹자는 낮은 성적, 한신의 존재감 때문에 인기가 없다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합병과 구단 역사 승계를 통해 3개 구단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오릭스는 팬들의 외면을 받기에 충분했다. 과도한 욕심으로 인기가 떨어졌다는 평도 있다. 오릭스는 언제부터 '비인기 구단' 으로 전락했을까.
- 한신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단지 한신의 존재가 오릭스의 인기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신은 오사카 지역의 연고구단 지향과 함께 반(反)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선의 ‘핵심’을 담당하며 도쿄에 맞서는 간사이 지방의 대표 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릭스는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부터 지역 연고보다 스타 선수 영입, 오사카로 이주한 이주민을 위한 팀이라는 색깔로 팬들에게 다가갔다. 즉 간사이와 오사카가 아닌 지역 출신들이 좋아할 팀이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오릭스는 지역 내 스스로 외인구단이 되길 자처하며 한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한큐 브레이브스는 타지방에서 이주한 ‘친’ 요미우리 혹은 ‘반’ 한신 팬들과 그간 야구 경기를 볼 수 없었던 지역민까지 포섭하며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한큐 브레이브스가 설립되던 1936년은 태평양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파나소닉, 산요 등 일본 내 굵직한 기업들이 오사카에 설립되며 많은 이주민들이 몰렸다(2007년 일본프로스포츠는 지역 연고화 선언을 했다. 팀 명 앞에 지역명을 붙임으로 지역 대표구단으로 발돋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한신은 ‘오사카 한신’이라는 지역명을 붙였지만 오릭스는 팀명을 바꾸지 않았다).
한큐 브레이브스는 당시 응원가에서도 ‘고향은 잠시 잊고 야구에 집중하자’는 등 이주민의 서러움을 담은 노래들을 다수 사용했다. 이는 한큐 브레이브스부터 오릭스까지, 이주민 정책은 현재도 이어져 재일동포에게 확대됐다. 이후 구대성을 비롯한 한국선수 영입이 이어졌다.
일본의 유명 칼럼리스트 나가타니 오사무는 자신의 저서 ‘누가 프로야구를 죽였는지’를 통해 “한신과 오릭스는 간사이 출신과 이주민의 수적 차이로 인한 인기 차이일 뿐”이라며 "관중수의 차이는 있지만 오릭스의 실제 인기 체감도 만만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의 장기적 침체에 따라 프로야구 운영이 부실해지며 오릭스 역시 중대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 프로야구 재편성 문제 부각
1980년대 후반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1990년대 중반 '타격머신' 스즈키 이치로의 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고베 대지진이 발생하자 구호 캠페인과 재해 지역 위문경기를 통해 지역 연고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동 연고지 킨테츠 버팔로스(철도)와 후쿠오카를 기반으로 한 다이에 호크스(유통)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정부 고위 관료부터 일본프로야구기구(NPB) 까지 프로야구 재편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부각됐다.
이들은 부실한 두 구단을 해체하고 10구단 단일리그로 축소 개편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킨테츠는 오릭스로, 다이에는 지바 롯데로 합병하자는 의견이었다. 특히 고베를 연고지로 삼았으나 한신과 오릭스 사이에 끼여 이렇다할 인기를 얻지 못했다.
구단 합병에는 선수들 거취와 구단 역사 계승이 큰 쟁점으로 부각됐는데 여기서 오릭스는 킨테츠 출신의 핵심 선수들만 고르고 나머지는 자유이적 선수로 푼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당시 핵심 선수 이와쿠마 히사시는 “모두가 함께 할 수 없으면 안 된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결국 오릭스로 넘어간 선수는 많지 않았다.
이와쿠마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와 여론의 힘을 얻고 새로운 창단 기업으로 등장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입성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오릭스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릭스 팬들은 “모두를 포용하지 못하며 합병에 나선 구단은 이해가 안된다”라며 반발했다. 킨테츠 팬들은 “알맹이만 먹고 버리는 구단의 팬이 될 수 없다”며 다수가 라쿠텐의 팬으로 넘어갔다.
원구단의 팬들과 합병 구단 팬들 모두 등을 돌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팬들이 공중 분해된 가운데 당시 아사히 신문, 니혼TV 등 언론사 주최로 실시된 오릭스 합병의 타당성 여론조사는 80%넘는 지지율로 오릭스를 규탄했다.
한편, 킨테츠의 팬들은 다수 라쿠텐으로 흡수됐다. 현재도 라쿠텐이 오사카에서 경기를 펼치면 많은 원정 응원 팬들이 입장하고 있다.
- 다양한 역사를 가지려는 ‘욕심’
오릭스에게 닥친 문제는 선수 수급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릭스는 합병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 구단은 한큐 브레이브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 킨테츠 버팔로스의 역사를 함께 가지고 간다”라고 발표한 것이 화근이었다.
프로야구에서 정통성 계승의 문제는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발전하는 특성상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합병 초창기 오릭스는 킨테츠의 역대 성적을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킨테츠가 거둔 4번의 리그 우승을 포함시켰다. 일본 프로야구 팬들의 전체적인 반발로 현재는 성적 통합을 보류한 상태다.
아울러 연고지 문제도 발생했다. 합병 초에는 고베 호토모토필드와 쿄세라돔을 동시 홈구장으로 사용한다고 발표했지만 고베는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판단으로 고베를 연고지가 아닌 ‘준연고지’로 격하시켜 경기수와 팬서비스를 줄였다.
대신 뜬금없이 도쿄 홈경기가 늘어났다. 오릭스는 합병 이후 7년간 도쿄돔 홈경기를 가졌다. 하지만 프로야구 전문가와 팬들의 전체적인 반발을 산 오릭스는 “너희 동네 관리나 잘 해라”라는 비아냥과 함께 원정석만 가득 차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현재는 도쿄돔 홈경기를 폐지하고 오릭스 그룹 사원들을 초청하는 그룹 패밀리 데이로 변경했다.
현재까지도 팬들의 의견은 명확하다. 오릭스는 합병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해체된 팀 선수들 일부와 역사만 가져가 각종 마케팅, 팬 확보에 혈안이 된 팀이라는 것이다. 오릭스는 이 문제에 대해 큰 의견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오릭스와 킨테츠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