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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커브처럼 살다가 떠난 최동원

기사입력 2011.09.15 08:25 / 기사수정 2011.09.15 08:25

김영민 기자

[엑스포츠뉴스= 김영민 기자]한국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큰 별이 떨어졌다.

한국 프로야구의 대투수 최동원이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일산병원은 최동원 전 한화 2군감독이 14살 오전 2시경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대장암 판정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후 병세가 호전돼 2009년 KBO 경기운영으로 활동하는등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했으나 지난해부터 다시 병세가 악화돼 요양 치료를 받아왔다.

최동원은 선동열과 더불이 80년대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최고투수였다. 83년 9승 16패 2.89의 방어율로 화려하게 데뷔한 최동원 84년 27승 13패를 거두면서 자신의 생애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최동원은 통산 103승 74패 2.46의 방어율을 기록했다.특히 84년 롯데 자이언츠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쟁취해낸 한국시리즈 우승은 오로지 최동원의 불굴의 투지와 헌신에 의한 것이었다.

최동원은 7경기의 한국시리즈중 무려 다섯차례나 등판하면서 40이닝을 등판했다. 현대 프로야구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이기에 가능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등판이었다. 최동원은 1984년 9월 30일 벌어진 1차전에서 9이닝을 7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완봉승을 거둔다. 이어 이틀을 쉬고 등판한 3차전에서 9이닝동안 6피안타 2실점으로 다시 삼성타선을 막아내면서 완투승을 거두게 된다.

이어 이틀을 쉬고 등판한 5차전에서는 8이닝을 6피안타 3실점으로 막아냈지만 팀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해 완투패 하고 만다. 궁지에 몰린 롯데 자이언츠는 다음날 벌어진 7차전에서 최동원을 구원투수로 등판시키며 승리하게 되고 최동원은 이날 경기에서 구원승을 따내며 한국시리즈 3승째를 거둔다.

최동원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손으로 승리를 일궈냈다. 하루를 쉬고 등판한 7차전에서 9이닝을 4실점으로 막아내면서 또 다시 완투승을 거두며 10일동안 40이닝을 던지고 그 중 4경기를 완투하면서 팀의 반이상을 홀로 막아내면서 팀을 정상으로 올려놨다.

최동원은 85~87시즌에서도 20승-19승-14승을 거두며 선동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투수로 평가됐다. 하지만 88년 선수협의회 결성 움직임에 최동원은 롯데에 미운털이 박혀 버렸다.이에 롯데는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최동원을 삼성으로 보내고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이 선수협 결성 움직임은 훗날 그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이지만 이 때문에 91년은퇴 이후 10년만인 2001년에야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의건 타의건 그는 아마시절과 프로시절 엄청난 혹사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야구란 그런것이었다. 누구도 잘못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후에 인터뷰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선수의 최대 사명인 팀의 승리를 위해 맡은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다. 이광환 전 히어로즈 감독은 그의 별세 후 그의 모습을 선수들이 모두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선수 최동원을 높였다.

투수 최동원의 최고의 무기는 직구와 폭포수와 같은 커브였다. 특히나 그의 커브는 세상 그 어떤 커브보다 강렬하고 빠르고 다이나믹했다. 그는 자신의 커브처럼 강렬하고 다이나믹한 삶을 살다가 조금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보여줬던 투지와 열정을 팬들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최동원 전 감독의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되며 발인은 16일 오전 6시이다. 장지는 경기도 자유로 청아공원이다.

[사진 = 고 최동원 감독 빈소 ⓒ 엑스포츠뉴스 권태완 기자]

 



김영민 기자 sexydubu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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