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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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저주가 시작되다!

기사입력 2006.03.20 08:04 / 기사수정 2006.03.20 08:04

손병하 기자

수많은 스타의 출현과 경기장 및 축구 관련 인프라의 발달, 여기에 TV 중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월드컵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지구촌에 존재하는 200개가 넘는 나라 중 절반에 가까운 국가들이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 2년 동안 치열한 예선을 치렀고, 본선에 오르는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했을 만큼 월드컵은 단일 종목이 해낸 성과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월드컵은 그렇게 꾸준히 진화하고 있었다.

제11회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개최 배경

▲ 아르헨티나 월드컵 포스터
ⓒ fifaworldcup.com
잉글랜드 월드컵 개막을 나흘 앞둔 1966년 7월 6일. 런던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아르헨티나는 FIFA 집행부로부터 1978년 월드컵 개최를 약속받았다. 아직 1974년에 치러야 하는 10회 대회의 개최국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차기 대회인 11회 대회의 개최국 약속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물론, 지난 9회 대회의 개최국 선정 때 아르헨티나가 멕시코에 개최권을 넘겨주며 FIFA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이유로 FIFA가 아르헨티나에 개최권을 약속할 리는 없었다. FIFA가 지독히도 월드컵 개최에 운이 없었던 아르헨티나에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이유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1970년 대회의 개최지를 선정하며 붉어져 나왔던 각종 로비 의혹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였다. FIFA는 "올림픽을 개최해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멕시코를 선택했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1974년 월드컵을 서독에 안겨주었고, 이에 가장 반발이 심할 아르헨티나에 11회 대회 개최권을 약속함으로써, 거센 비난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자 한 것이었다.

세계 축구의 중심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을 11번째 대회에 와서야 개최한다는 것에 FIFA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었으나, 꿈의 제전인 월드컵 개최가 현실로 다가오자 착실하게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남미에서는 우루과이 브라질 그리고 칠레에 이어 4번째로 월드컵을 개최하는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월드컵 준비를 하던 아르헨티나도 그 과정이 순조롭진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자국 정세가 조금씩 틈을 모이며 흔들리고 있었고, 쿠데타 정권의 인권유린과 반정부 게릴라단체의 저항은 월드컵을 준비하는데 많은 지장과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각 나라들은 어지럽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아르헨티나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FIFA에 거세게 항의하며 개최국 변경을 주장했다.

하지만, 월드컵 개최가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아르헨티나 국민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월드컵 본선 참가국 선수단에 아르헨티나 정부와 반 정부게릴라 단체에서 '신변보장'이라는 서약서를 받기로 함으로써 일단락 지었고, 아르헨티나의 정부와 반 정부게릴라 단체들은 "월드컵의 개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해 참가국들을 안심시켰다.

세계 정상의 축구강국임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개최권 획득에 실패하며 자존심을 구겼던 아르헨티나는 이렇게 하여 꿈의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다.

▲월드컵 뒷얘기

인권 탄압과 흑색선전으로 얼룩진 월드컵

지난 1934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 무대로 월드컵을 이용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불식시키고 용서를 구하는데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받쳐야 했었다. 헌데,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아르헨티나군부는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대회 기간 내내 흑색선전 등을 퍼부어 월드컵이 또 한 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당하는 슬픈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아르헨티나군부의 인권 탄압도 엄청나 월드컵 역사에 깊은 상처를 주고 말았다.

펠레의 저주, 이제부터 시작이야

펠레의 저주란 그가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꼽는 팀이 졸전 끝에 예선 탈락하는 전통을 두고 생긴 말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출전한 펠레는 "우리는 우승을 하기 위해 왔으며, 줄리메가 브라질의 영광을 지켜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 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78년 월드컵부터 펠레의 저주는 본격적인 활약을 개시하게 되는데, "우승후보는 독일이다. 또 하나의 복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루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두 팀 모두 8강에서 짐을 싸야했다. 특히 페루는 2라운드에서 무려 10실점에 단 1득점도 하지 못하는 졸전을 펼치며 쓸쓸히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콜롬비아와 독일을 우승후보로 꼽으며 브라질은 자격이 없다며 혹평했지만, 브라질은 보란 듯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의 우승을 장담했지만 예선 탈락했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우승 후보로 지목한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모두가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아르헨티나 부끄러운 월드컵 우승

지난 1974년 이후 두 대회 연속 결승에 오른 네덜란드나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우승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아르헨티나나 '월드컵'을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유럽 최강과 남미 최강이 맞붙은 명승부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8 만에 가까운 관중은 아르헨티나의 우승에 환호를 질렀지만, 그 경기 내면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날 경기에서 무려 50개가 넘는 프리킥 기회를 얻었다. 반대로 말하면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50회가 넘는 파울이 주어진 것이다. 한 경기에서 보통 양 팀을 통틀러 35~40개의 파울이 나온다는 점을 가만하면 네덜란드가 얼마나 심한 경기를 펼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외관상으로 보이는 기록과 달이 네덜란드는 과격한 경기를 펼치지 않았다. 되려 억울한 판정을 당하며 경기를 펼쳤었다. 네덜란드는 눈에 뻔히 보이는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2분에 한 번씩 아르헨티나에 프리킥을 허용해야 했고, 결국 그러한 편파 판정으로 월드컵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반세기 만에 월드컵 개최와 우승의 꿈을 이뤘지만, 결코 떳떳하고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대회 기록

*대회기간 : 1978.6.1 - 1978.6.25(25일간)
*참 가 국 :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브라질, 프랑스, 헝가리, 이란, 이탈리아, 멕시코, 네덜란드, 페루, 폴란드, 스코틀랜드, 스페인, 스웨덴, 튀니지, 서독 (총 16개국)
개최도시 : 부에노스아이레스,멘도자등 5개도시
*총 득 점 : 102골, 평균 득점 2.68골
*총 관 중 : 1,610,215명, 평균 득점 42,374명
*득 점 왕 : 캠페스(6골·아르헨티나)
*결 승 전 : 아르헨티나 vs 네덜란드(3 : 1(연장전 포함), 아른헨티나 우승)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스포츠가 그 순수한 의도와 목적을 잃어버렸을 경우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는지 잘 알려준 대회였다. 아르헨티나군부는 월드컵을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리는 선전 무대로 이용했지만, 결국 되돌려받은 것은 국제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경기장엔 무려 160만 명이 넘는 대관중이 들어차고 흥행 면에서도 절대적인 성공을 거둔 월드컵이었지만,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결코 아름답고 자랑스럽지 못한 월드컵으로 기록되고 있다.



손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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