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0.07.26 09:43 / 기사수정 2010.07.26 09:43
[엑스포츠뉴스=부산, 김현희 객원기자] 많은 야구팬은 동시대를 풍미할 만한 좌-우타자들, 혹은 투수들을 향하여 붙여 주는 호칭이 있다. 바로 ‘좌-○○, 우-○○’이 그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교야구를 즐겨 본 이들이라면, 배명고 우타자 김동주와 신일고 좌타자 김재현(좌-재현, 우-동주)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후 등장한 경북고 이승엽과 대구상고 김승관(좌-승엽, 우-승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대통령배나 청룡기 전국대회를 통하여 그 기량을 마음껏 드러내 보인 바 있으며, 프로에서도 남다른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2000년도에도 부산고 마운드를 호령했던 ‘미소년’ 좌-우 투수들이 있었다. 바로 추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김백만(전 한화 이글스)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야구팬들은 이 둘을 일컬어 ‘좌-(추)신수, 우-(김)백만’이라고 불렀다. 이들 부산고 듀오는 예상대로 프로구단에 입단하며, 범상치 않은 재주를 드러내 보인 바 있다. 이 중 김백만은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2차 1번으로 지명됐다. 계약금 2억 원이라는 액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화 구단은 그에게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
출발은 좋았다. 데뷔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첫 선발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최고의 외국인 투수였던 갈베스(전 삼성 라이온스)와의 선발 맞대결에서 2실점 완투 패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때는 야구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 완투 패를 하고 나서 팬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게 정말 잘한 건가?’라는 생각에 프로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그렇게 추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 1, 2군 무대를 전전하며 선수 생활을 보냈던 김백만은 2009시즌 직후 김민호 감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부산고 투수 코치로 적을 옮겼다. 선수 은퇴 이후 부산고 후배들을 돌보며, 화랑대기/봉황대기 준비에 한창인 김 코치를 부산고 교정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라이벌이자 친구, '부산고의 추신수'
- 각설하고, 1999~2000년 부산고교 멤버는 그야말로 화려했다. 특히, 대통령배 대회에서 2연속 우승했을 때 좌완 추신수를 포함하여 우완 투수에는 김 코치님이 계시지 않으셨는가.
김백만(이하 ‘김’) : 솔직히 당시 ‘좌-추신수, 우-김백만’이라고 많이 불렀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그저 평범하기만을 바랐다. 야구라는 종목이 한 사람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만 못 한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성적이 나면 모두가 잘하는 것이고, 나쁜 성적이 나면 모두가 못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추)신수에게 고마운 부분이 많다. ‘누군가를 이겨봐야겠다.’라는 생각을 만들어 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1999년도 대통령배 우승했을 때에는 내가 우수투수상이라도 하나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추)신수가 MVP하고 우수투수상 모두 가져가더라(웃음). 그래서 2000년도에는 열심히 했다. 예선전을 혼자서 다 던지고, 28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본선에 오르면서부터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준결승전 덕수정보고(현 덕수고)와의 경기에서 류제국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래서 3학년 때에는 그래도 상을 하나 정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상을 안 주더라.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또 웃음). 그래서 그때 ‘살아남아야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만큼 추신수와는 절친이자 라이벌이지 않았는가.
김 : 그렇게 (추)신수가 MVP하고 우수투수상을 석권하는 모습을 보니, '아, 내가 저 친구만큼은 이기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나중에 모두 프로에 입단하고 난 뒤에는 나나 (추)신수나 누구랄 것도 없이 “너로 인하여 좋은 곳에 갈 수 있었다.”라고 서로 격려했다. 그렇게 이야기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지난해에도 시즌 끝나고 학교에 왔는데, 아니 이 친구가 코치실로 오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냥 여기서 음료수나 하나 마시고, 교장실에 가서 교장선생님이나 먼저 만나 봐라"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친구 만났다고 안 나가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저기 놓여 있는 공에 사인이나 좀 하고 가라!”라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얘기했다. 그런데 또 이 친구가 바닥에 앉아서 공에 사인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웃음). 그래서 참 고마운 친구다.
- 당시 감독님이 돌아가신 조성옥 감독님이었다.
김 : 그런데 나는 실질적으로 조성옥 감독님보다는 현재 동의대 감독님으로 계시는 이상번 (당시) 코치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 내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이 내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버지께서 내가 고교 1학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도 병원에 입원하시다 보니, 야구를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 그런 나를 잡아주시고, 또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분이 이상번 코치님이셨다.
조성옥 감독님은 한마디로 '무서운 감독님'이셨다(웃음). 물론 잘해 주실 때에는 잘해 주셨다. 그런데 조성옥 감독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때마침 내가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부산으로 내려와서 장례식에 참가했었다. 그때 김민호 감독님을 만났는데, 사실 그때부터 감독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또 웃음).
-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좀 해 보자. 김 코치님처럼 개성중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은 좀처럼 부산고에 진학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 코치님은 정말 드물게, 개성중-부산고를 졸업했다.
김 : 우리 때부터 그랬다. 보통 개성중학교를 졸업하면, 개성고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개성중학교 졸업생들 중 가장 잘하는 친구들은 경남고에, 그 다음 잘하는 친구들은 부산고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9~2000년 대통령배 2연패 했을 때 경남고에서 ‘왜 김백만이를 잡지 않았느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웃음).
▲ 화랑대기 8강전에서 승리한 직후 후배들과 함께 교가를 부르고 있는 김백만 코치. 김 코치는 추신수-정근우와 함께 부산고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주인공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골든 루키, 김백만
- 2001년 롯데 우선지명은 추신수가 받았던 반면, 김 코치님은 한화 이글스에 2차 1번 지명을 받았다.
김 : 그때는 걱정이 많았다. 고교 3년 내내 혼자 생활했는데, 또 다시 타지에서 혼자 생활해야 된다는 사실에 걱정부터 앞섰다. ‘어디 가도 야구 하는 것은 똑같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혼자라는 생각에 타지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일찍 결혼하여 아내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많이 의지가 됐다.
- 한화 이글스가 낸 김 코치님의 당시 결혼 보도자료를 본 바 있다.
김 : 사실 그 부분에 대해 구단에 정말 고맙게 생각했다. 1, 2군 선수들 모두 결혼식에 와 준 것을 보니, '아, 내가 인생을 헛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 마음고생이 많았다고는 하나, 2001년 출발은 상당히 좋았다. 특히, 당시 최고의 외국인 투수였던 갈베스와 맞대결하여 2실점 완투 패를 하기도 했다.
김 : 그때 선수생활 하는 동안 처음으로 기립 박수를 받았다. 스무 살의 투수가, 마운드에서 저렇게 던지는 것을 보고 팬들도 많이 의아해 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렇게 던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립박수 받고 나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그 경기 전에 첫 선발승을 거두는 등 출발은 상당히 좋았다. 초반에 아주 잘 나가다 보니, 프로라는 무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았다.
- 이후 1, 2군을 왔다갔다했지만, 2008시즌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정말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노장들이 많은 한화 마운드에서 김백만과 같은 젊은 투수는 반드시 필요했다.
김 : 사실 1, 2군 왔다갔다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 팀 동료였던 (김)태균이가 나에게 와서 "이제 우리 나이가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 젊은 것 같지만, 사실 그만 둘 나이도 멀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자!"라고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그때 (김)태균이, (류)현진이, 마정길 선배 등 네 명과 함께 제주도 산행을 하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이후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면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캠프 때 보여주려는 욕심에 페이스를 너무 빨리 끌어올린 것이 탈이었다. 시범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개막전 엔트리에도 올랐지만, 한 번 탈이 나기 시작하더니 ‘아! 나는 결국 안 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교때 ‘잘 되는 쪽’으로 많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쁘게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게 됐다.
- 당시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감독님은 어떠한 분이셨는가?
김 : 말이 없으셨던 감독님이셨다. 그런데, (선수들을) 안 보는 척하시면서도 다 보시는 분이셨다. 또, 한 번 믿어주면, 끝까지 선수를 믿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 믿음이 흐트러지면, 끝까지 믿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하셨다.
- 한화 이글스 김백만에게 2군은 어떠한 무대였는가?
김 : '득(得)’과 ‘독(毒)'이 있는 무대라 생각한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그나마 내가 2군에서 오래 버텼던 것은 1군을 왔다갔다하면서 ‘1군’의 깊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험도 없었다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2군에서는 코칭스태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나를 믿어주어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2군 마르티네즈’라는 별명도 있지 않았는가(웃음). 아쉽게도 1군 무대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프로에서 ‘야구’보다는 ‘인생’을 배웠다.
부산고의 신예 투수코치, 김백만
- 결국, 2009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됐다. 사실, 지난 2월에 부산고 교정에서 김 코치님을 만났을 때 상당히 당황했다. 한화에 계셔야 할 분이 부산고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았나.
김 : 김민호 감독님을 포함하여 양상문 코치님 등 부산고 동문이 일제히 ‘모교로 가라!’라고 이야기하셨다. 어찌나 많이 이야기하셨는지, 꿈에서도 그분들이 등장할 정도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또 다른 나’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 시즌 끝나고 모교로 오게 됐다. 내가 또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어쨌든 ‘김백만’이라는 투수를 프로로 갈 수 있게 해준 학교가 부산고 아니었는가. 이렇게, 내가 받은 은혜를 후배들 양성으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 그래서 많은 프로구단 스카우트가 부산고 에이스 이민호를 향하여 ‘제2의 김백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투구 폼이 비슷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시던데?
김 : (웃음) 아니다. 내 폼으로 만들려는 생각은 절대 없다. 나는 그저 '잘 던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이다. '물고기를 그냥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 내 임무 아닌가. 간혹 내가 투구 시범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따라하는 후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폼을 따라한다고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준다.
▲ 1학년 에이스 송주은의 투구 상태를 점검하는 김백만 코치.
- 이민호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 올 시즌부터 1학년 투수들부터 정식으로 김 코치님의 지도를 받게 됐다. 송주은을 포함하여 좋은 1학년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지도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김 : (단호하게) 솔직히 이 친구들을 지금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 고등학교에서만 야구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 내 제자들이고 후배들인데, 좋은 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왜 없겠는가. 다만, 지금은 ‘성장 가능성이 큰’ 친구들일 뿐이다.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내 임무다. 다행스러운 것은 1학년들이 자질도 있을 뿐 아니라,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1999~2000년 시절의 부산고와 지금의 부산고 모습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김 : 지금은 개인주의적인 모습이 강하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야구에 대한 애절한 생각이 강했고, 그랬기에 눈에 불을 켜고 야구 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많이 줄어들었다. 생활 여건 자체가 좋아지다 보니, ‘야구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일례로 한 연습경기에서 우리가 졌는데, 한 녀석이 3안타 쳤다고 혼자 웃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가장 싫어한다. 이겨도 다 잘해서 이긴 것이고, 져도 다 못 해서 진 것인데, 후배들이 그런 인식이 조금 부족하다.
-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항상 학교에 상주하시면서 선수들을 독려할 때에는 독려하고, 칭찬할 때에는 칭찬하는 것 같다.
김 : 사실 내가 소위 말하는 ‘컴맹’이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컴퓨터를 배웠다. 하다 보니까 워드 프로세스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선수 개개인의 훈련 스케줄, 재활 스케줄, 식단표, 청소 담당구역 등을 정하게 됐다. 정말 신경 쓸 것이 많다(웃음).
- 마지막 공식 질문이다. 김 코치님께 ‘야구’란 무엇인가?
김 :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야구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1회 초를 유년 시절로 본다면, 이때에는 기초를 닦에 되고, 2회에는 2회대로 배우는 것이 있다. 1회부터 9회까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것, 그것이 야구다.
※ 김백만(부산고등학교 투수코치)
1. 생년월일 : 1982. 10. 12
2. 체격조건 : 186cm, 86kg
[사진=부산고 김백만 투수코치 (C) 엑스포츠뉴스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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