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대한민국과 이란의 2007 아시안컵 B조 예선 세 번째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 45분 터진 설기현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1-1무승부를 기록하고 말았다.
예선 3경기 결과 한국은 2승 1무로 승점 7점을 기록해 조 선두는 지키게 되었지만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친 터라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남았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프리미어리거 3총사에 J-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조재진 여기에 러시아에서 뛰고 있는 이호와 김동진까지 해외파 대부분이 주전으로 나선 이 날 경기에서 대표팀은 시종 경기를 리드하며 상암벌에 모인 6만 관중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추가 시간에 수비 집중력이 무너지면서 동점골을 허용해 기대했던 홈에서의 통쾌한 승리를 미뤄야 했다.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시아 최강 중 하나인 이란을 상대로 펼친 경기 내용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며 1-1이란 경기 결과도 그렇게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대표팀의 진로에 염려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멀티 플레이는 이제 그만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멀티 플레이어란 말이다. 이 말은 한 선수가 최소 두 개에서 최대 세 네 개의 포지션이 소화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가 은퇴한 유상철이었다. 유상철은 현역 시절 전방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수비형 미드필더와 최종 수비까지 고루 맡았다.
이후 한국 축구에서는 멀티 플레이어란 말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은 것이 한국 축구의 장점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박지성은 좌우 측면 공격수 자리와 중앙 미드필더를 맡을 수 있고 이영표는 좌우 측면 수비가 가능한 선수다. 설기현도 최근 경기에서는 오른쪽 측면에서 플레이 하고 있지만 양쪽 측면에서 뛸 수 있는 선수다.
지난 독일 월드컵에서도 딕 아드보카트 전 대표팀 감독은 이런 선수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 이영표를 오른쪽에서 뛰게 했고 박지성은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사용한 바 있다. 물론 이들 모두 무난한 플레이를 보이기는 했지만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경기를 펼치건 기본 정도는 할 수 있는 선수들이지만 최고의 경기력을 펼칠 수 있는 자리는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번 경기를 앞두고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우려했던 부분도 이런 멀티 플레이의 활성화였다.
이는 설기현이 선발 출장했던 오른쪽 측면 자리는 이천수도 좋은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고, 김동진의 출장으로 이영표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출발했다.
이천수와 설기현을 모두 사용해 선수들의 포지션이 다시 변경되고 김동진을 위해 이영표가 자리를 옮기는 그런 선수 구성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영표는 왼쪽 측면 수비수로 출장했고, 설기현도 이천수를 제치고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경기에 나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선수들의 포지션 변경이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바로 김동진과 김상식의 중앙 수비수로서의 포지션 이동이었다.
제 자리를 찾아주자
이 날 경기에서 오랜만에 대표팀에서 제자리를 찾은 설기현과 이영표 그리고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라이언 긱스와 왼쪽 측면 주전 경쟁을 펼치고 있는 박지성은 가장 익숙하고 알맞은 포지션에서 경기를 펼쳤다.
설기현은 최전방에서 활발한 움직임과 발군의 돌파력을 뽐내며 최근 활약이 반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고, 이영표도 오른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발한 오버래핑과 매끄러운 공수 연결로 경기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데 일조했다.
박지성의 활약도 빠지지 않았다. 전반 다소 부진했던 박지성은 후반 본연의 기량을 되찾아 최고의 활약을 펼쳐보였다. 특히 후반 16분부터 이란 진영을 휘저으며 1분간 보여준 '매직쇼'는 6만여 팬들의 함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경기 막판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김상식의 실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포지션 변경은 앞으로의 한국 축구를 위해서라도 분명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핌 베어벡 감독은 김동진의 중앙 수비수 변경에 대해 "이영표가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선수라 그의 공간을 뒷받침할 만한 선수가 필요했고 김동진이 수비력과 제공권은 물론이고 왼발을 잘 사용해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를 기용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수하긴 했지만 김상식도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인 알리 카리미와 하셰미안을 잘 마크하며 중앙 수비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또 김상식은 성남에서 중앙 수비수로 여러 번 경기를 펼쳤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포지션은 엄연히 왼쪽 측면 수비수와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누어져 있다. 그 자리에 기용할 선수가 없었다면 몰라도 그들의 자리엔 분명 김진규와 김영철이라는 전문 중앙 수비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핌 베어벡 감독의 선택이 포지션의 최적화가 아닌 선수에 포지션을 맞추는 것이었다면 앞으로 한국 축구의 행보에 분명 우려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전방 스트라이커로 성장하던 박주영은 본 프레레 전 감독 시절부터 측면 공격수로 자리를 바꿔 혼란을 겪었다. 이영표도 월드컵에서 오른쪽으로 출전했던 경험이 현재 토트넘에서 다소 위험한 상황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또 중앙과 좌우 측면을 모두 오갔던 박지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수들은 분명 자신이 가장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가장 어울리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포지션을 무시하고 선수를 출전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면 선수 개인은 물론이고 대표팀에도 적지 않은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멀티 플레이어'. 이제 한국 축구를 따라다녔던 이 말을 버렸으면 한다. '멀티 플레이어'란 단어 대신 그 포지션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일 수 있는 '스폐셜 리스트'들로 가득 채워진 대표팀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