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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영웅 (3)] '쇼트트랙 영웅' 김동성을 그리다

기사입력 2010.02.07 16:53 / 기사수정 2010.02.07 16:53

김지한 기자

[엑스포츠뉴스=김지한 기자] 2000년대 한국 쇼트트랙을 이야기하면 김동성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잇따른 부상 악재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던 김동성은 두 차례 올림픽에서 극명한 희비를 맛본 스케이터다. 그럼에도,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가 김기훈, 채지훈에 이어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성과를 낸 선수라는 점이다.

탄탄대로였던 '나가노의 영웅'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김동성은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탄탄대로를 걸어온 선수였다. 18살이었던 1997년, 세계선수권에서 캐나다의 마크 가뇽을 제치고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김동성은 채지훈 이후 답보 상태에 있을 뻔했던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해 전국종별선수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성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김동성은 이듬해 2월에 열린 나가노 동계올림픽 남자 1000m에서 '날 들이밀기'로 역전 우승을 차지해 개인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막판 폭발적인 스퍼트를 이용해 '신기'에 가까운 '날 들이밀기'로 1위에 오른 김동성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며 순항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김동성의 상승세는 이어졌다. 1998-99 쇼트트랙 월드컵 종합 1위, 팀선수권 3관왕, 1999 동계 아시안게임 2관왕 등 남자 쇼트트랙의 1인자로 완전히 거듭났다. 지능적이면서도 폭발적인 그의 주법은 세계 정상급 실력을 자랑했고, 그렇게 김동성의 행보는 탄탄하게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것도 그의 대표적인 라이벌, 리지아준(중국)과의 마찰이 독이 되고 말았다.

부상, 그리고 편파 판정…잇따른 악재

당시, 김동성과 세계 쇼트트랙의 쌍벽을 이루었던 리지아준은 중국을 대표하는 스케이터였다. 세계선수권 2연패 등 중국 쇼트트랙에 큰 족적을 남긴 리지아준이었지만 김동성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만 남겼다.

2000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레이스 도중 김동성과 함께 넘어지면서 스케이트 날이 김동성의 팔과 허벅지를 찢게 한 것이다.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김동성은 약 1년 넘게 대수술과 재활을 거듭하며, 스케이트를 신지 못한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혹독한 재활의 노력 끝에 복귀하자마자 월드컵 대회 종합 1위에 오른 김동성의 마음은 솔트레이크시티를 향하고 있었다. 올림픽 2연패와 개인 첫 다관왕을 노릴 만큼 컨디션은 대수술을 받은 선수가 맞나 싶을 만큼 최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번 발목을 제대로 잡은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반칙왕'으로 명성을 높였던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가 그 주인공이었다.

2000년 세계선수권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오노는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기세등등한 경기력으로 상승세를 탔다. 그렇다고 김동성의 경기력이 오노에 미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올림픽에서 있을 수 없는 편파 판정이 김동성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남자 5000m 계주 예선부터 시작해 심판들의 황당한 판정이 한국 선수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운데서 김동성 역시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리지아준의 반칙에도 결승 진출에 실패하는 아픔을 맛봤다. 마지막 하나 남은 남자 1500m에서 김동성은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결승에 올라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는 오노를 제치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 올림픽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김동성은 한풀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하늘 위로 치켜세우며 금메달 획득에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심판들은 김동성이 인코스로 치고 들어오는 오노를 몸으로 밀었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며, 실격 판정을 내렸다. 오노가 마지막 바퀴에서 갑자기 두 손을 올리는 '헐리우드 액션'에 제대로 속은 것이다.

결국, 2위로 들어온 오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김동성은 금메달을 빼앗겼다. 한국 선수단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를 지켜본 국민들 역시 '반미 감정'이 치솟으며 오노의 '만행'에 분통을 터트렸다.



 
세계선수권 6관왕, 그리고 은퇴


 
4년의 노력이 헛되이 돼버린 순간이었지만 김동성은 곧바로 재기에 성공했다. 마음을 다 잡고 출전한 세계선수권에서 6관왕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김동성의 전관왕은 1993년 김기훈 이후 9년 만에 한국 쇼트트랙이 거둔 쾌거였다. 특히 남자 1500m에서 출발하자마자 스퍼트를 내며 2위 선수와 한 바퀴 반 차이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은 '김동성이 분노의 질주를 펼쳤다'며 통쾌해하는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김동성의 질주는 거기서 끝났다. 2000년에 다친 무릎 통증이 재발하면서 제대로 된 선수 생활을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연예계에 몸을 담갔다가 다시 선수로 복귀해 재기를 꿈꿨던 김동성은 결국 2005년 2월, 18년 스케이터로서의 인생을 마감하며 은퇴를 결심했다. 이후 TV 해설위원을 하면서 후배 안현수의 '복수극'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김동성은 국제 심판이 되겠다는 결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는 미국 내 유소년 선수들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오뚝이 정신, 김동성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김동성은 우리에게 '비운의 스케이터'로서 더 깊이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가 '쇼트트랙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추앙받고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일어서서 세계 정상에 오른 '오뚝이'같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수술 후에 월드컵 1위에 오르고, 편파 판정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뺏긴 직후에도 세계선수권 전관왕에 오른 '강심장' 김동성의 가치는 오늘날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최고의 기량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동성. 지도자, 더 나아가 심판으로서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고 싶어하는 영웅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사진=김동성 ⓒ 2008년 12월 3일 MBC TV '네버엔딩 스토리'에서 근황을 전한 김동성. 당시 방송에서 미국 클럽 코치로 있다고 전함]



김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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