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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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박스] 그날 저녁 서울월드컵경기장 기자석에선

기사입력 2009.09.30 16:35 / 기사수정 2009.09.30 16:35

전성호 기자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아…. 아!'  FC서울과 움살랄(카타르)의 2009 AFC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 열리고 있던 9월 30일 오후 10시 20분. 서울월드컵경기장 곳곳에서 장탄식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데얀의 마지막 회심의 헤딩 슈팅이 골문으로 빨려들듯 하더니 움살랄 골키퍼의 손에 잡히고 만다.

일순간 벌떡 일어나 환호를 준비하던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비명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리고 경기 종료. 1-1. 2차전 합계 1무 1패. 서울의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너무나 또렷이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경기장 한가운데를 카타르 국기를 든 움살랄 선수들이 환호성과 함께 가로지른다.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서울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땅을 바라보거나 대(大)자로 쓰러져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세뇰 귀네슈 감독을 비롯한 서울 코치진도 올 시즌 가장 큰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상황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끝인가…. 정말 끝난 건가.' 아직도 패배를 믿을 수 없는 관중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서있었다.

그때 움살랄 골키퍼가 서울 서포터즈 '수호신' 쪽을 향해 조롱 섞인 환호를 보내며 그들의 공허감을 분노로 바꾼다. 안태은의 골을 뺏어가 놓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간을 끌면서 축구다운 축구를 보여주지 못한 '주제'에…. 그러나 그들은 승자였고, 이유야 어쨌든 패자는 분한 눈물만 가슴 속에서 끓일 뿐이었다. 요즘 TV광고에 등장하는 'The Winner Takes It All'(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라는 문구가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1만 5천 여명이 모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가장 냉정하고, 가장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던 기자석 한 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몸은 서울에, 마음은 포항에

동행한 기자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손목시계는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기 시작 시각이 8시 30분이었고, 통상적으로 기자들이 경기장을 찾는 시간이 1시간 30분~2시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금 서두른 편이었다. 경기장 안 기자석으로 들어가자 이미 20여 명의 취재진이 기자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화면을 띄워놓고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자를 비롯해 취재진들이 이렇게 빨리 경기장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포항 스틸야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포항 경기가 6시 30분에, 서울 경기가 8시 30분에 시작하기 때문에 둘 다 챙겨보기 위해선 일찌감치 상암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인터넷 중계를 키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포항과 분요드코르의 전반전이 0-0으로 끝나면서 시계는 7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힘들겠다'란 반응이 조심스레 나온다. 때마침 서울과 움살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경기장에 나섰지만, 기자석의 시선은 여전히 쉽사리 경기장을 향하지 못했다. 기성용과 마그노의 몸 상태보다는 스테보와 데닐손의 골감각에 더 신경이 곤두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포항이 후반 시작과 포항이 선제골을 넣자 기자석이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접속이 용이하지 않았거나 그전까진 다른 업무에 바빠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이들조차 모두 다른 기자 옆에 삼삼오오 모여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데닐손의 두 번째 골이 터지는 순간, 기자석 곳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우와!'

'이러다 정말 4강 가는 거 아냐?' 여기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곧이어 스테보의 패스를 이어받은 데닐손의 발끝에서 포항의 세 번째 골이 작렬했다. 함성은 이미 감탄사로 바뀌어 있었다. '포항 정말 장난 아닌데?', '와 이걸 뒤집네!' 기자들은 놀라움과 경탄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일부는 성급하게 파리아스 포항 감독의 차기 대표팀 감독 자리까지 거론할 정도였다.

퇴근 시간에 맞춰 경기장에 들어오던 관중도 복도와 맞닿은 기자석 끝쪽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노트북 모니터를 한 번씩 흘끗 쳐다보며 기자들에게 '몇 대 몇이에요?'라고 물었다. 상기된 표정과 함께 '3 대 0'이란 대답이 돌아오자 하나같이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포항 쪽 경기종료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기자들 대부분은 포항의 4강 진출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곤 서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취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분요드코르의 만회골이 들어갔고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했다. 기자석 곳곳에서 '아, 이게 끝나야 경기를 제대로 볼 텐데 큰일이네!'라는 작은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상암벌엔 서울과 움살랄 선수들이 입장해 경기 시작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지만 기자들의 온 신경은 오로지 포항 스틸야드에 가 있었다.

어느덧 월드컵 분위기가 돼버린 기자석


 그건 마치 월드컵 최종예선이나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서울과 움살랄은 이미 경기를 시작했고, 기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어진 임무를 위해 그라운드에 집중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중간 중간 드로잉이나 프리킥 상황에서 시간이 지체될 땐 여지없이 모니터 구석에 작게 띄워놓은 포항전 중계를 바라보게 됐다.

그러나 포항과 서울을 넘나드는 '이중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반 12분 코너킥 상황에서 서울이 움살랄 수비수를 놓치며 선제골을 내주고 만 것. 관중석은 물론 기자석도 일순간 조용해졌지만 하나같이 '어…. 이럼 안 되는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3분 뒤, 기성용의 날카로운 중거리 슛을 움살랄 골키퍼가 잡지 못했고 이를 달려들던 데얀이 밀어넣으며 후반 15분 서울이 곧바로 동점골을 뽑았다. 이른 시간의 만회골. 됐다. 이제 한 골만 넣으면 된다.

월드컵 예선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축구 경기엔 큰 리액션이 없는 기자석이건만 오늘따라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기자의 본분을 지키기 위한 냉정함과 서울과 포항의 승리를 바라는 열망이 계속해서 우열을 가리며 뒤섞인다. 순간 느꼈다. 경기장을 통틀어 가장 정적이고 가장 조용한 기자석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 마음속에 가장 크고 깊게 자리하고 있는, K-리그를 정말 사랑하는 감정들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틸야드에선 스테보가 결승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경기 끝. 포항이 기적적으로 4강에 진출했다. 그 소식을 접한 기자들은 이미 눈앞의 서울 경기에 집중한 나머지 큰 반응을 보이진 못했지만, '포항이 해냈다.'라는 기쁨에 엷은 미소를 띤 채 계속해서 그라운드를 내려봤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만 갔다

포항의 4강 진출이 확정되고, 이제 서울이 움살랄만 이기면 K-리그는 챔피언스리그에 4강에 두 팀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한 팀은 무조건 결승에 간다. 2006년 전북 현대의 아시아제패 이후 내리 2년간 일본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내주었고, 올해 32강 조별리그에선 J리그와 중국 수퍼리그에 고전하며 자존심에 흠집이 났던 K-리그의 명예 회복이 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축구에 대한 명예 회복이었다. 선수의 시력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레이저 공격을 서슴지 않고, 명명백백한 골 장면을 '못 봤다'라고 발뺌하고, 이기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지리멸렬하게 시간을 끄는 중동 축구가 훼손한 축구의 원시성과 연속성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런 것들로 승리만을 원하는 이들에겐 승리는 물론 축구도 허락할 수 없었기에 마음속으로 더더욱 서울의 한 골을 갈망했다.

하지만, 서울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전광판 시간은 어느덧 후반 마지막 10분을 알리고 있었다. 공격진을 모두 가동하며 한 골을 노리는 서울이었지만 움살랄은 투톱 마그노, 다비를 제외한 8명이 간격이 좁은 두 개의 라인을 형성해 중앙선조차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지나치게 촘촘한 수비에 서울로서도 공격의 실마리를 쉽사리 잡지 못했고, 움살랄 선수들은 자신이 파울을 저지르고도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움살랄 골키퍼는 골 킥 때는 서울 선수가 놓고 간 공을 들고 굳이 반대편 페널티 지역까지 천천히 걸어가 찼다.

선수 교체 시에는 벤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선수를 교체했고, 교체되는 선수는 모른 척 버티고 있다가 휴가에서 복귀하는 군인인 마냥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기자석에서도 '시작됐다. 시작됐어'란 비아냥과 함께 '해도 너무한다.'란 불만이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대기심이 들어올린 추가 시간 팻말엔 '4'가 쓰여있었다. '왜 4분밖에 안주냐?'란 불만이 나올 틈도 없었다. 기자석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은 깍지 낀 두 손을 코앞에 댄 채 최대한 평정심과 냉정함을 유지하(려하)면서 경기를 바라봤지만 안타까움과 초조함은 애 끓는 마음에 몸부림을 치는 여느 관중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서울이 공격을 나설 땐 눈은 그라운드에 고정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패스!' '그쪽!' '때려!'같이 짧지만 간절한 탄식에 가까운 '조용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김치곤의 문전 슈팅이 골키퍼 정면을 향할 때 그 반응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공격.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데얀이 솟구치며 헤딩슛으로 연결했다. 1초도 안 되는 그 순간 공이 날아가는 장면이 초고속 카메라로 잡은 영상처럼 지나간다. 골키퍼는 몸을 날렸지만 공의 궤적도 좋다. 충분히 골라인을 넘어갈 수 있다. 공이 계속해서 날아가던 그때, 골키퍼의 두 손이 공을 감싸쥔다. 미끄러져라. 튕겨 나와라. 그러나 골키퍼의 손가락이 공을 감싸쥐면서 골키퍼가 떨어진다. 그리고 공도 골라인 바깥에서 멈춘다. 모든 관중은 물론이고 (기자를 포함해) 기자석 중간 중간에서도 벌떡 일어나며 아쉬움에 머리를 감싼다.

그리고 그렇게 경기는 끝이 났다

경기 내내 같은 마음으로 경기를 바라보던 기자와 관중은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완전히 다른 방향에 들어선다. 한쪽은 응원가를 부르거나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혹은 경기장을 빠져나오며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거나 아쉬운 마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기자들은 펼쳐놨던 노트북 컴퓨터, 수첩, 펜을 챙겨든 채 총총걸음으로 경기장 지하를 향해 움직인다. 선수와 감독의 인터뷰를 듣기 위해서다. 평상시엔 경기 종료 직후 대부분 바쁘게 이동하는 게 보통이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계단 입구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취재진이 눈에 많이 띈다.

동행했던 다른 기자는 후반 30분쯤부터 말없이 경기만 지켜만 보더니 종료 직후 나오는 길에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라고 고백한다. 3년 전 독일땅에서 태극전사들이 아쉬움에 땅을 치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침에 이런 기분을 안고 하루를 시작했던 게 지옥 같았던 그때를 생각하니, 차라리 오늘은 밤이라 다행이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경기 후 인터뷰가 이뤄지는 장소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별도의 인터뷰실에서 갖는 정식 기자회견, 다른 하나는 라커룸에서 선수단 버스로 이동하는 중간에 마련된 믹스드존(공동취재구역, Mixed Zone)이다. 정식 기자회견엔 주로 양 팀 감독이 들어와 공식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는 반면 믹스드존에선 선수와 기자가 뒤섞여 무형식의, 일종의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갖는다.

동행한 기자에게 믹스드존 인터뷰를 부탁하고 정식 기자회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선수 라커룸 주변을 지나치는데 움살랄 쪽 라커룸에서 요란한 노랫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온다. 씁쓸했다. 그리고 정말 저절로 '씁쓸…하구먼…'이란 유행어를 닮은 탄식이 나왔다.

올 시즌 최대 목표였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꿈이 날아가 버린 귀네슈 감독은 담담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통상적으로 정식 기자회견이 시작되면 감독이 먼저 경기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 뒤이어 취재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귀네슈 감독이 소감을 밝힌 뒤 사회자의 '질문 있으신 분?'이란 말을 던졌지만 몇 초간 인터뷰실엔 정적이 흘렀다. 안타까움에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도 기자들은 그들의 본분을 위해 고생했다는 말 대신 몇 마디 질문을 던지며 그저 묵묵히 키보드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귀네슈 감독의 인터뷰가 끝나고 움살랄의 제랄드 감독이 들어올 차례였지만 깜깜무소식이다. 뒤늦게 제랄드 감독이 등장했지만 영어와 불어 통역만 대동하고 들어왔다. 황급히 서울 측에서 영어를 한글로 통역할 인원을 호출한다. 인터뷰가 계속 지체되자 그때 기자들 사이에서 진심을 가득 섞은 농담 한 마디가 튀어나온다.

"크…. 여기서도 시간을 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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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 엑스포츠뉴스 김현덕 기자]



전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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