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7.25 09:20 / 기사수정 2009.07.25 09:20
[엑스포츠뉴스=서울월드컵경기장, 전성호 기자] '세계 최고의 팀이 모두에게 최고는 아닙니다.'
7월 24일, K-리그의 FC서울과 ‘잉글랜드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금호타이어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코리아투어 2009' 친선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 주변은 경기 시작 4시간 전부터 경기장을 가득 메워줄 6만 5천 명의 축구팬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레플리카를 입고 머플러를 두른 채 '세계적인 명문구단' 맨유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들든 표정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는 침통한 표정의 한 청년이 노란색 피켓을 들고 우두커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1인 시위였다.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1인 시위라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가까이 다가가니 청년은 수원 삼성의 앰블럼이 새겨진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수원의 최대 라이벌인 서울과 잉글랜드 클럽 맨유의 경기에 수원 팬의 1인 시위라니. 그 사연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세계최고가 모두에게 최고는 아닙니다. - (T)here is another happiness in K League.'
그렇구나. 짐작이 갔다. 세계 최고는 맨유를 지칭하는 것일 테고, 영어로 쓰인 문장은 지난 2007년 맨유와 서울의 친선경기 당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 걸려 큰 논란을 일으켰던 'Here is another Old Trafford'라는 걸개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1인 시위의 주인공은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에서 활동 중인 조준상(28)씨. 그는 K-리그 일정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면을 보인 맨유의 방한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고 밝혔다.
“맨유가 큰 인기를 누리는 세계적인 클럽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경기의 엄청난 수익은 모두 맨유의 몫일 뿐,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팬서비스란 이름의 활동들은 모두 고도의 상술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라며 맨유의 이번 방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실제 이번 방한을 통해 맨유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적게는 4만 원에서 많게는 30만 원까지 하는 경기 입장권은 매진됐고, 1만~1만 5천 원의 관람료를 내야 참관할 수 있는 경기 전날 공개훈련에도 주최 측 추산 약 7500여 명이 모였다. 이 외에도 용품 및 기념품 판매, '맨유 레스토랑' 개장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번 투어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 역시 일각에선 끊이지 않았다.
덧붙여 조씨는 “많은 축구팬이 'K-리그는 수준이 낮다'는 편견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물론 절대적인 실력 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TV로만 경기를 볼 때는 중계 기술이나 카메라 앵글의 차이에서 오는 부분도 있다. K-리그는 실제로 보면 그렇게 느리고 재미없지 않다.”라면서 K-리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오해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놨다.
분명하고 근거 있는 비판의식에 서울 서포터즈 '수호신'들도 함께 조씨의 1인 시위 자리를 지키며 힘을 더했다. '수호신'의 일원인 김창우(43)씨는 “수호신도 오늘 경기에서 조직적인 서포팅 대신 소규모 단위의 개별적인 응원만을 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지만, 한 나라의 프로축구리그가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친선 경기 일정을 공표하고, 또 이를 위해 연맹과 구단이 직접 나서 리그 일정까지 바꿔주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라며 비판한 뒤 “이 때문에 우리 수호신 회장이 자진사퇴할 정도로 수호신 내에서도 이번 경기는 불만이다.”라며 존중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K-리그의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비록 소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팀을 위해, K-리그를 위해, 한국축구를 위해 생각하고 걱정하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은 기자가 아닌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도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결국, 이들의 행동은 양식과 찬반의 방향만 다를 뿐, 상암에 모여 축제를 즐기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축구를 향한 뜨거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달리 월드컵은 물론 유럽리그 등을 매일같이 접하며 '보는 눈'이 높아진 축구팬들의 기대에 K-리그가 미치지 못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시각으로 K-리그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 역시 문제다.
K-리그는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실력을 갖춘 리그다. 외국에서 온 기자들도 하나같이 K-리그의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립서비스 차원의 평가가 아니다. K-리그는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룬 대표팀의 근간이 되는 리그다. 마음을 열고 즐길 준비만 된다면, K-리그는 굉장히 매력적인 프로축구리그다. 물론 선진 유럽리그에 비해선 제도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그렇기에 개선과 발전을 위한 관심을 쏟게 되고 더 애착이 간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더군다나 실력이 부족해도 K-리그도 엄연히 EPL과 같은 하나의 프로축구리그고, 프로리그의 일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설령 그 대상이 아무리 '대단하고 귀하신' 맨유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줄 것은 한 푼도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쓰이지 않을 막대한 스폰서 비용과 경기 입장료면 충분했지, K-리그의 소소한 행복과 얼마 남지 못한 자존심까지 곁들여 줄 필요는 없었다.
이날 서울은 맨유와 대등한 경기 내용을 펼친 끝에 2-3으로 아쉽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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