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6.26 00:46 / 기사수정 2009.06.26 00:46
[엑스포츠뉴스=안양, 유진 기자] 프로스포츠나 학원스포츠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어렵지만, 코치직에 대한 수행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고교야구에서 전체 게임 판도를 정하고 큰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감독이지만, 선수들의 세부적인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살펴 주는 것은 코치들의 몫이다. 또한, 많은 선수를 하나하나 보살피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지만, 이를 보조하는 코치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을 그라운드에 두고 펑고(fungo)를 쳐 주는 일, 프리배팅을 위한 공을 던져주는 일을 포함하여 제자들을 위한 '굳은 일'은 보통 감독이 아니라 코치가 직접 해 주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과 직접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라 오히려 코치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안양 충훈고등학교 김우석 코치는 경기 전 제자들의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고 몸소 배팅 볼을 던져주거나 펑고를 쳐 주는 일을 절대 마다하지 않는 '열혈 타격코치'다. 하지만, 김 코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애를 쓴다.
2008시즌 직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제자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김우석 코치를 25일 유신고와의 연습 경기 후 충훈고등학교 숙소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Q : 오늘(25일) 연습 경기,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아직까지 '선수 김우석'으로서 코치님을 기억하는 팬 여러분께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우석(이하 '김'으로 표기) : (쑥스러운 듯) 잘하지 못한, 빛도 못 본 선수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저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은 2007년 9월 경기에서 ‘결정적인 에러’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Q : (웃음)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접어 두겠습니다. 음, 인천고-홍익대를 졸업하면서 당시에는 아마야구에서 ‘가장 잘 나가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프로 지명은 동기들에 비해 가장 늦게 받으셨어요.
김 : 네 맞습니다. 당시 대학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업팀인 포스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상무로 군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상무에서 잘한 것도 있었지만, 실업팀에 몸담고 있을 때 프로야구 2군 팀과의 경기에서 그럭저럭 잘한 것이 저에게는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결국,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LG에 지명되었는데, 동기들 가운데 제가 가장 늦게 입단했습니다(웃음).
Q : 당시 아마야구에는 김재현, 김동주, 윤재국, 조인성, 조진호 등의 화려한 멤버를 자랑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동기들 중 강력한 라이벌은 누구였습니까?
김 : 대부분 동기가 저와는 거리가 있던 사이였습니다. (윤)재국이는 저와 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조)인성이가 많이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라이벌을 뽑자면 당시 고교야구에서 팔방미인으로 통했던 신일고 김재현(SK 와이번스)과 경북고 김수관(전 삼성 라이온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김수관은 당시 2루수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같은 내야수였던 저로서는 그 친구를 따라 잘하고 싶었습니다.
Q : 실업 이후 상무에서의 활약이 컸습니다.
김 :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지명받지 못하면서 (프로행을) 거의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기에 실업팀 생활을 통하여 가업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또 잘 풀려서 1999년부터 2000년까지 국가대표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추후 2002년 프로 지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Q : 상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뒷이야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김 : 신병 훈련 때가 가장 기억이 남습니다. 당시 임수민(전 한화 이글스), 황성관(전 삼성 라이온스) 선배와는 군대 동기였던 반면, 야구 동기들은 대부분 말년 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구선수 출신들이 많이 늑장부린다.’라고 해서 조교들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들은 때였습니다. 저마저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소대 선임도 했습니다(웃음). 재미있기도 했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것도 옛날 이야기가 됐습니다.
Q : 주로 2군 무대를 전전하셨지만, 1군 무대에서 홈런을 딱 하나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2004년도인데, 잊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김 : 네 맞습니다. 그때가 한화전이었는데, 프로 첫 홈런이었습니다. 팀이 이겼기에 더욱 기뻤습니다(웃음). 그런데 여기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는데, 당시 (이)병규 형이 연속안타 기록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게 또 당시 경기에서 끝나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9번 타자로 나서서 볼 카운트 1-3까지 골라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벤치에서는 사실 다음 볼을 치지 않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웃음). 볼넷으로 살아나가면 다음 타석에 (이)병규 형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5구째를 쳐서 홈런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무안타를 기록 중이었던 (이)병규 형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왔었지만, 결국 연속안타 기록은 그날을 끝으로 끊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네가 홈런 쳐서 다행이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Q : 그렇다면 당시 홈런 친 경기가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였습니까?
김 : 그것도 기억에 남지만, 그보다는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마)해영이 형에게 연속타자 홈런을 맞으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어 준 기억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2002년은 제가 프로무대를 처음 밟았던 때였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팀이 하위권을 전전하였지요.
그런데 2군 무대에서 저는 웬만한 1군 무대 엔트리 부럽지 않은 선수들과 함께했습니다. FA로 LG 유니폼을 입었던 (홍)현우 형, (진)필중이 형, (마)해영이 형과 2군 무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기량 저하로 2군 무대에 섰던 텔레마코, 아이바 등과도 같이 생활했습니다. 이것도 색다를 추억이었지요.
▲ 충훈고 제자들과 함꼐 한 김우석 코치
Q : 김 코치님께 ‘2군’은 어떤 무대였습니까?
김 :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꿈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곳이라 생각합니다.
Q : 2007시즌을 앞두고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각오도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김 : 2006년 12월에 결혼을 했지만, 스프링 캠프에는 못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몸이 참 좋지 않았습니다. 장 쪽에 염증이 있는 희귀병에 걸렸는데, 이 때문에 80kg이던 몸무게도 70kg으로 줄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병 때문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지요.
Q : 이번에는 조금 아픈 기억을 꺼내 보겠습니다. 2007년 9월 7일, SK와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범한 것이 추후 삼성으로 이적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김 : 그것 때문에 저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웃음). 당시 1군에 단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시즌 초에 올라오라는 부름은 있었지만, 결국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9월에 1군 엔트리가 조절되었을 때 김영직 2군 감독님의 추천으로 어렵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타구를 우익수에게 맡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큰 나머지 실수를 했습니다.
Q : 결국 작년에는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되셨는데, 백업 멤버로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김 : 사실 많이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컨디션도 좋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연습도 많이 했고,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비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되어도 역시 문제는 방망이였습니다. 또 신명철, 김재걸 등의 멤버들이 버티고 있었던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1군에 콜업된 것도 당시 (박)진만이가 아파서였을 뿐이었습니다.
Q :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김 : 1군에 20일 정도 있다가 경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궤양성 대장염’이 도졌습니다.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가 다시 도지고 나니까 한 달을 입원해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입단시켜 준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여 ‘시즌 끝까지는 있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를 끝으로 삼성에서 저를 웨이버 공시했고, 그것을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됐습니다. 사실 2군 생활은 견딜 수 있었지만, 아들을 보러 서울을 들락거려야 했던 것도 제 마음을 다잡게 하였습니다. ‘나 하나 야구 하자고 이러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도 컸습니다.
Q : 김인식 감독님의 부름으로 충훈고 코치직을 맡게 되셨습니다.
김 : 사실 요양 이후 아는 지인이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저에게 ‘매니저가 필요하다.’라고 해서 3개월가량 커피숍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김 감독님께 연락이 와서 충훈고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LG 2군 시절 스승님이셨고, 또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코치직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Q : 그래, 직접 가르쳐 보니 어떠십니까?
김 : 어휴, 예상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습니다. ‘야구 기술만 가르치자!’라는 생각으로 왔는데, 그것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구하는 학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을 포함하여 기숙사 생활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신경을 써 줘야 했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저에게는 숙제입니다. 힘들지요(웃음). 그러다가 경기 도중,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저 스스로도 당황을 하게 됩니다. 아직 초보 코치이기 때문에 공부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Q : 김 코치님께 ‘야구’란 무엇입니까?
김 : 영원한 숙제입니다. 기다림의 연속이기도 하고요.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니 더욱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Q : 마지막으로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지금도 LG시절 동료였던 김용우, 최길성(이상 SK 와이번스)과 통화를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할 때까지 계속하면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 김우석(충훈고등학교 타격코치)
1. 생년월일 : 1975. 9. 2
2. 포지션 : 내야수
3. 체격조건 : 181cm, 78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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