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1.12 21:36 / 기사수정 2009.01.12 21:36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1990년 이후 현재까지 가장 일취월장한 팀을 꼽으라면 단연 두산 베어스다.
지금은 두산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고 있지만, 1993년 전까지만 해도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라이벌’ LG 트윈스와의 전적에서도 늘 열세를 보였던 두산 베어스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을 1993년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하위권을 전전하던 당시 OB 베어스가 막판 LG트윈스의 부진을 틈타 단숨에 정규시즌 3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 있던 선수는 다름 아닌 ‘신인 김경원'이었다.
‘제2의 선동렬’로 불리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김경원은 2001년 프로무대를 떠난 이후 8년 만에 다시 ‘2군리그 투수코치’로써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선수시절에 비해 다소 살이 붙기는 했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과 폭넓은 지식만큼은 현역시절 못지않았다.
Q :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김경원 선수를 기억하는 팬 여러분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경원(이하 ‘김’으로 표기) : 제가 선수생활을 그렇게 꾸준히 한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징검다리식’으로 했죠. 1993년도에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 1994년도에는 부진했고, 1995년도에는 다시 괜찮은 모습을 보였던 식이었죠. 그런데 OB(두산) 베어스가 1992년도 까지만 해도 최하위였는데, 1993년도에 갑자기 정규시즌 3위를 했고, 1995년도에는 우승을 했죠. 이에 대한 인상이 강력하게 남아 있어서 아직까지 잊지 않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마시절의 추억
Q : 아마야구 시절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죠. 고등학교 3학년 8월에 있었던 한, 미, 일 고교야구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3:0 완봉승을 거두었습니다
김 : 당시 첫 번째 경기에 선발등판하기로 되어 있던 선수가 바로 위재영 투수(은퇴. 前 SK 와이번스)였습니다. 그런데 첫날 경기가 비로 순연되었고, 이 때문에 제가 2차전 일본전에 등판하게 됐죠. 완봉승을 거두었지만, 안타를 참 많이 맞았습니다(11피안타). 그런데 당시 일본이 ‘정말로 잘 치는’ 타자들만 모아 라인업을 꾸렸습니다.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거둔 선수의 타율이 3할 2푼, 4번을 친 모도키 다이스케(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끈 강타자)가 4할을 쳤으니까요.
그런데 모도키 선수에게는 네 번 만나서 세 번이나 안타를 허용했습니다. 정말 잘 했죠(웃음). 그런데 안타를 많이 맞고도 실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 내야진이 정말로 철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지현(LG 트윈스), 김종훈(삼성 라이온스), 김태균(SK 와이번스) 등 당대의 내야수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자신있게 공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마지막 9회에 모도키를 다시 만났어요. ‘이번에 맞더라도 큰 것만 맞지 말자’는 생각으로 던졌는데, 삼진으로 돌려 세웠습니다(웃음). 대체로 일본 선수들이 스윙이 짧고, 변화구 대처능력이 뛰어나서 상대하기 어려웠습니다.
Q : '제2의 선동렬‘ 이라는 칭호와 동시에 ’제 2의 박동희‘라는 칭호도 받았는데, 그 시기가 언제부터였습니까
김 : (웃음) 중학교 때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께서는 “저기 박동희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때 저는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정말 몰랐었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됐죠.
Q : 고교시절에 메이저리그로 갈 수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 그때 밀워키 브루어스 더블A로 박철순 선배를 스카우트하셨던 분을 만났습니다. 대한야구협회에 ‘좋은 선수를 추천해 달라’고 문의를 하셨는데, 그 추천 대상에 제가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해 여름에 테스트를 받았죠. 그런데 군 문제 등 복잡한 문제가 섞여 있어서 뜻대로 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에 시간상으로 대학시절에 그러한 기회가 왔다면 갈 수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Q : 그래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대학에 진학하시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고려대학교 출신(64학번)이셔서 내심 고대 진학을 바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앙대학교로 가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 : 그때까지만 해도 아마야구에서만 국가대표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저에 대한 외부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대학교보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중앙대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일단 저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좋았고, 시설과 환경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중앙대학교로 가게 된 것입니다.
Q : 대학시절에는 고교시절과는 달리 ‘김경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김 : 1, 2학년때는 선배들이 선발로 나서면 저는 주로 구원투수로 나가서 2~5이닝을 던지는 수준이었습니다. 경기 출장숫자에 비해 던지는 이닝 수는 비교적 적었죠. 지금이야 던지는 공의 개수까지 고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한 개념이 그다지 크게 정립되지는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매 경기에 나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죠.
그렇게 1, 2학년을 보내다가 3학년부터는 선발로 나서는 경기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에서는 고교시절 혹사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 몸에 큰 무리가 오지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혹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관록에서 묻어난 김경원 선수의 눈빛은 현역 시절 못지않았다
무서운 신인 등장 : 프로무대 이야기
Q : 비교적 잠잠했던 대학시절과는 달리 프로무대에서는 ‘무서운 신인’으로 재등장했습니다. 당시 준플레이오프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김경원 선수는 당시 세 경기 모두 등판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 맞습니다. 1차전에서 1이닝(1:2 패)을 던졌고, 2차전에는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던 도중 덕아웃에서 “5회부터 던질 수 있게 준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회부터 몸을 풀었고, 5회에 등판하여 9회까지 던졌습니다. 3차전에서도 2:1 리드상황에서 등판하였는데, 당시 첫 타자가 송구홍(現 LG 트윈스 코치) 선수였습니다. ‘선두타자만 잡으면 이기겠다’는 생각이 워냑 컸는지 볼넷을 내주었고, 이후 폭투와 야수 에러, 적시타가 나오면서 역전이 됐습니다. 당시 충격이 워냑 컸는지 이후 상황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웃음).
Q : 그런데 마지막 3차전에서 ‘커튼 콜(Curtain-call : 경기가 끝난 후 선수가 관객의 환호에 답하여 다시 그라운드로 나오는 것을 지칭)’을 받으셨어요.
김 : (웃음) 그렇습니다. 경기를 마무리하고 덕아웃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홍보팀 직원이 저에게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경기장이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랴부랴 그라운드에 갔는데……3루 측 LG 관중석에는 빈자리가 많았는데, 1루측 OB 관중석은 그대로!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않고 남아있었습니다. “김경원”을 외치는 소리에 마운드로 올라갔는데, 그 순간만큼은 처음 마운드에 올랐을 때보다도 떨렸습니다. 그래서 인사하고 내려왔죠.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 본 커튼콜을, 그것도 큰 경기에서 받아보았기에 감격스럽고, 또 기뻤습니다.
Q : 이후 유지현 선수와의 라이벌 관계가 흥미를 이끌었어요
김 : 그것 참……제가 유지현과의 결정적인 승부에서 한두차례 진 기억이 생생해요. 봉황대기 준결승전에서 맞은 역전타의 주인공도 충암고교 유지현이었고, 1997년에 역전 결승타를 맞은 것도 유지현이었죠. 그래서 1997년도 올스타 MVP를 유지현이 받았잖아요?
그런데 1993년에도 그랬습니다. 그때 올스타전에서 이강돈(前 한화 이글스) 선배에게 역전타를 맞았고, 그 해 올스타전 MVP 선정에 제가 한 몫 했죠(웃음). 이 외에도 박철순 선배의 10승을 본의 아니게 제가 가로막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철순 선배께서 롱 릴리프로 나와서 잘 던져주고 물러나셨고, 타선도 또 제때 터져서 제가 등판하여 잘 막으면 박 선배의 ‘최고령 10승 기록’이 가능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저 역시 ‘연속이닝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야 했기에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전). 그런데 주자 2루 상황에서 최태원 선수에게 동점타를 맞았습니다. 박 선배의 10승도, 제 연속이닝 무실점 기록도 모두 무산이 되어버렸죠. 경기는 이겼지만, 참 안타까웠습니다.
Q : 1994년에 다소 부진했지만, 1995년에는 다시 좋은 성적을 냈고, 팀도 우승을 했어요
김 : 시즌 초반에 발목 부상으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용호 선배가 불펜에서 잘 버텨주어 후반부터는 제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서는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죠. 그래서 팀은 우승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운치 못한 우승’ 이었습니다. 이는 한화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주 : 1998 시즌 이후 한화로 트레이드). 1999 시즌에 소속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는데, 제가 한 역할이 미미하여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Q : 2001년 시즌 이후 한화에서 재계약 포기 의사를 표하자 LG에서 오라고 했었는데?
김 : LG가 그 전에도 저에게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았어요. 1998년도에도 연락이 왔었거든요. 트레이드로 영입하려고 했었던 모양입니다. 2001 시즌 이후 LG 스카우터께서 전화로 “던질 수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바로 계약하자고 했다면 주저 없이 사인했을 거예요. 그런데 1주일 테스트 과정을 거쳐 입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알았기에 고사를 표했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연골수술을 받은 이후 오랫동안 아팠거든요. 재활과정이 없다 보니 이후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10년을 버텼는데, 이 때문에 수술이나 재활 모두 힘들어져 버렸습니다. ‘뼈’에 대한 이야기는 병원에서도 확답을 못 하거든요. 자신감을 잃었죠. 그래서 쉬어보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LG에서 연락이 온 만큼 쉬다 보면 다른 구단에서도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후 별다른 연락이 없었습니다.
은퇴, 그리고 제2의 삶
Q : 은퇴 이후 생활에 대해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어떠한 계기로 아마야구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 : 사실 은퇴 이후 야구는 안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른 분야도 만만치 않더군요. 더구나 IMF 이후 좋아지지 않은 경기체감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코치생활을 해 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LG로 이적한 이용호 선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춘천고교 야구부) 코치를 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결국, 제가 가장 자신있는 것은 야구였고, 고교생이라면 가르칠 것이 많겠다는 생각에 코치직을 수락했습니다. 춘천고교에서 15개월, 대전고교에서 3년, 안산공고에서 1년 정도 했는데, 대전고교를 제외하면 야구할 수 있는 여건이 어려운 학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Q : 그렇다면 경찰야구단 코치직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김 : 안산공고 코치 시절에 한화 스카우터의 추천으로 대전방송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산과 대전을 오가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방송 해설을 맡다 보니 그동안 인사를 못 드린 선배님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밭 구장에서 유승안 감독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안산에만 있었다면 이러한 계기가 마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해설위원을 맡았던 것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은퇴 이후 아는 선수가 별로 없었는데, 해설을 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고, 선수들도 파악하게 되면서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Q : 경찰청 야구단 소개를 좀 해 주십시오
김 : 선수들에 대한 레벨을 잘 모르다가 최근에야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태입니다. 일단 투수쪽에서는 손승락(히어로즈), 타자쪽에서는 조영훈(삼성 라이온즈)이 1군 레벨이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선수들도 1.5군~2군 수준이라 생각하구요. 작년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시즌 후반부터는 경기내용이 좋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양한 연령층의 다양한 수준의 선수들이 있는 만큼 나이 있는 선수들이 어린 선수들을 잘 받쳐주기만 한다면 올 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리 경찰청 야구단은 ‘첫 술에 배불러야’ 합니다. 소속팀으로 복귀하건, 아니면 전역하여 신고선수로 입단하건 간에 몸을 잘 만들어서 돌아가야 하는 데다 군복무를 하는 이곳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또 경찰야구단은 선수 25명을 선발하면 전역시까지 쓰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2년 주기로 선수를 변경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10월에 선수모집 공고를 해서, 선발하고, 합격자 발표하고, 훈련소 생활(6주)을 마친 후 여기에 오게 되면 1년차 선수들의 훈련시간이 부족합니다. 선수들이 1월 중순에서부터 2월에 들어오니까요. 4월에 시즌이 시작되니까 결국 한 달 정도밖에 훈련시간이 안 나죠. 그래서 유승안 감독님께서 이러한 구조에 대한 변경 건의를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Q : 개인적으로는 가입금 면제의 조건으로 상무와 경찰청 야구단을 1군리그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김 :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로는 기본적으로 이익이 발생해야 하므로, 그것과는 거리가 먼 군부대에서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2군리그 유지도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경도 나쁜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1군리그로 승격되면 좋기는 하겠지만, 25명의 선수가 100경기 이상을 치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선발투수는 고정을 시켜야 하고, 이 중에서는 난타를 당하는 선수에 대한 교체도 필요할 것입니다. 또 부상 선수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하는데, 이 모든 일을 25명의 선수로만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Q : 경찰청 야구단 코치로 2군이기는 하나 프로무대에 다시 모습을 보이셨는데, 프로 1군무대 복귀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김 :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교 투수코치를 하면서 저에게 지금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제 2군 투수코치로써 많은 선배님을 만나게 되면 또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2군 리그를 경험한다는 것은 저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Q : 마지막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요?
김 :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면 성공이건 실패건 간에 그 결과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은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자기가 계획하는 것이고, 1군 선수들도 경쟁을 통하여 경기에 나가는 것인데, 최근에는 선수들의 포기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구도에서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비해 선수들의 체격조건이나 환경, 금전적인 상황, 명예적인 조건 등이 좋아진 만큼, 지금 고생하는 것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아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쯤 저 선수만큼 하게 될까’라는, 다른 선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꾸준한 자기계발을 해 주는 후배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김경원은 누구?
1990년대 중반, ‘제 2의 선동렬’로 불렸던 우완 정통파 투수다. 1993년 데뷔하여 당시 신인으로써 믿기기 힘든 성적(방어율 1.11, 9승 3패 23세이브)을 올리면서 마운드를 호령했으며, 1995년 OB 베어스(現 두산 베어스)의 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이후 1997년까지 마무리 투수로써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 후배 진필중의 등장과 함께 1999년, 한화로 트레이드되었다.
바뀐 소속팀에서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였지만, 그다지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 두산 베어스 팬들로부터 신인으로써는 드물게 ‘커튼 콜’을 받은, 당대의 야구영웅이기도 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한화에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김경원은 이후 은퇴를 선언하며 고교야구 코치직을 수행했다. 6년간 후학양성에 매진하던 중 유승안 신임 경찰청 야구단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올해부터 경찰청 야구단 투수코치로써 활약하게 됐다.
'야인시대'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는 코너입니다. '은퇴한 야구선수의 근황'이 궁금하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문의는 readers@xportsnews.com으로 [야인시대 제보]라는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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