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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①

기사입력 2008.12.11 10:05 / 기사수정 2008.12.11 10:05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야구선수들, 특히 투수들에게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 바로 ‘배짱’이다.

제아무리 두려운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해도 투수가 기 싸움에서 지면 승부에서도 지기 마련이다. 현역 선수들이 마리아노 리베라를 최고의 배짱을 지닌 투수로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주무기인 면도날 같은 컷 페스트볼(일명 Cutter)을 자신있게 던지기 때문이다.

설령 커터가 난타를 당하더라도 그 다음날 세이브 상황만 되면 동일 구종을 던진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돈독한 배짱이 없다면 시행하기 어려운 행동들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최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 참가 의사를 밝혔던 ‘야인’ 김병현 역시 만만찮은 선수다. 공인이기를 거부하는 자연인 김병현. 1년간 야구를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자연인 김병현. 혹자는 그의 이러한 점을 특이하다고 여기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선수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 김병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본다. 

오히려 인간 김병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 남들이 의식하건 안 하건 간에 그는 지금도 그라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성균관대 경영학부 김정남 교수와의 만남

1997년의 어느 날, 現 성균관대 경영학부 MBA 대학원장을 맡고 계신 김정남 교수에게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야구부 지도교수를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스포츠과학부에서 해 온 것이었다. 이전에도 스포츠 분야에 있어서 적지 않은 경험을 해 온 김정남 교수는 고심 끝에 지도교수 자리를 수락하였고, 그때부터 성균관대 야구부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였다.

선수들을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부진하거나 슬럼프에 빠진 선수에게는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지적해 주신 교수님께서 당시 새내기로 들어온 선수 하나를 주목하시게 된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김교수의 눈을 사로잡은 그 학생은 법학과 97학번으로 입학한 김병현, 바로 그였다.



▲ 김정남 교수는 당시 첫눈에 김병현 선수의 대성을 예측하셨다고 한다.

국내에는 물론, 미국 프로야구에도 흔치않은 잠수함 투수인 김병현을 눈여겨보신 김정남 교수는 이제 막 새로 들어온 이 97학번 새내기가 나중에 큰 선수가 될 것임을 직감하셨다고 한다. 공의 빠르기나 무브먼트의 빼어남은 둘째 치더라도, 묵묵히 성실하게 훈련하는 모습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모습에 '1학년 답지 않다'는 칭찬을 하셨다고 한다.

언더스로임에도 불구하고 재학시절 당시 높은 스테미너를 가질 수 있었던 원인도 김병현의 꾸준함에 있었다. 그해에 바로 박찬호 선수가 데뷔후 첫 두자릿수 승수를 거둔 시기이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 이전, 김교수는 야구공 한 상자를 들고 오더니 김병현에게 다가가서 모두 사인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당시 2학년이었던 김병현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지도교수의 부탁에 군말 없이 전부 사인을 했다.

그러나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당시 성균관대 감독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아니, 교수님! 왜 병현이에게 저렇게 많은 공을 사인받으세요? 이제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2학년 선수인데……"

 "내가 보기에 병현이는 분명히 큰 선수가 될 것 같아. 그때는 더 사인받기 힘들어지겠지. 지금은 저 사인볼의 가치가 얼마 되지 않겠지만, 앞으로 10년 후에는 분명히 지금보다 몇 곱절의 가치가 있을거야." (김정남 교수)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진출한 빅리그

역시 김교수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의 활약은 김병현 선수의 주가를 더욱 높여주었고, 그 계기로 미 프로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박찬호 선수의 활약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도 對전 중국전에서 5이닝을 퍼펙트로 막은 김병현 선수의 활약은 - 어찌보면 당시 아시안게임의 승부처이기도 했다.

1999년 빅리그 입문으로 김병현은 일단 휴학이라는 형태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해 5월 29일, 메츠를 상대로 첫 세이브를 거두는 과정에서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장면은 아직까지 화자가 되고 있다.

당시 전반기 5승으로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한 활약을 펼친 박찬호 선수에 대한 기대가 "김병현" 이라는 신예의 등장으로 팬들은 또 다른 흥밋거리를 찾게 된 셈이었다.

김병현에 대해 김정남 교수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다(2003년 경영전략 수업 당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에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갔다는 점에서 너무 성급함이 있었다. 물론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에 비해서 (김)병현이는 그런 "성급함"을 자제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느 팀에 가든 상관없이, 그 팀에 꼭 없어서는 안 될 선수"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바탕에는 '꾸준함' 이란 무기가 있다."



▲ 김병현 선수가 계속 클로저 역할을 자처했다면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 투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데뷔 시즌에는 25게임에 등판하여 1승 2패 1세이브 방어율 4.61을 기록하지만, 김병현은 이에 대한 조급함 없이 다음 시즌을 기약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14세이브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한 김병현은 2001년 시즌에 방어율 2.94, 5승 6패 19세이브를 올려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단단히 기여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8승 3패 36세이브, 방어율 2.04로써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게 됨과 더불어서 올스타전에도 출전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김병현이 정점에 올랐을 때였다.

선발 전환과 칼 메이스의 저주

그러나 클로저로써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던 김병현은 2003년을 기점으로 선발투수로써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지인들은 모두 그의 무모한 결정에 반대했지만, 김병현은 주위의 목소리나 우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보직에 대해 즐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실제로 그는 클로저 시절부터 일류 타자들과의 승부에 대한 자부심과 배짱이 대단했다. 이미 對 시애틀전에서 이치로가 등장하자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를 범타 처리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승부처에서 클러치 히터는 피하라는 투수코치의 조언도 필요 없었다. 그는 본즈나 푸홀츠 같은 당대 1류 타자들을 범타 처리하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는, 그런 투수였다.

그러한 그의 고집은 결국 당시 밥 브렌리 감독의 고의사구 항명사건으로 연결됐다. 2003년 당시,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숀 그린에게 고의사구 지시를 했지만, 김병현은 강공으로 응수했다. 결과는 김병현의 패배로 끝났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애리조나 역시 둘을 갈라놓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맞이한 보금자리가 바로 보스턴이었다. 잠깐 선발을 맡기도 했지만, 당시 구단은 그에게 내년 시즌 선발의 조건으로 ‘임시 마무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김병현의 보직 또한 당시 '클로저;겸 '제6선발' 이었다.

2003 시즌 또한 성공적이었다. 선발전환이라는 무리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애 처음으로 100이닝을 던지며 9승 10패 16세이브, 방어율 3.31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김병현의 하락세가 이어졌다. 잠수함 투수가 선발보직을 맡기 어렵다는 ‘칼 메이스의 저주’가 그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 2부에서 계속 -

(주) 칼 메이스의 저주 : 역사상 가장 빼어난 성적을 거둔 '잠수함 투수' 칼 메이스가 속구를 잘못 던져 상대방 선수의 머리를 강타하여 숨지게 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이후로 잠수함 선발 투수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사진=김정남 교수(C) 성균관대학교 제공]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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