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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농심배] 전설의 끝 2편

기사입력 2005.03.10 00:39 / 기사수정 2005.03.10 00:39

주진효 기자

많은 이들이 불과 한달전에 이창호 구단의 모습이 안보인다고 했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무대가 막을 내릴 때

 

실은 그는 항상 거기 있었다


전설은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입니다. 그것은 엄숙한 의미에서 그리고 약간의 경건함까지 곁들여 전해져오는 신화와는 다릅니다. 신화는 건국 신화라는 익숙한 말에서 보듯이 신과 세상 창조의 얘기이고 한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담는, 그러한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인 수가 많죠. 그러나 전설은...전설은 그러한 경건한 신화와는 달리 살아있는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이고 신화속의 영웅과는 달리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까지도 훗날 전설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역설로 제가 전설로 비유해 이창호 구단의 이번 농심배 이야기를 하는 까닭입니다. 이창호 구단은 결코 신화속의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있고 우리처럼 말하고 걷고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시 수십년이 흐른 미래가 되면 우리와 함께 그도 언젠가는 사라질 보통 사람이기에 먼 훗날 그의 이야기가 전설로 남을 겁니다.

결코 많은 이야기가 전설로 남지는 않습니다. 후세가 기억할만큼 큰 영향을 가진 이야기가 남을 뿐이죠. 세월과 함께 모든 것이 스러져가지만 사람들의 기억으로 희미하게 계속 내려가는 이야기. 이창호 구단의 이야기가 전설로 남을 거라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상하이에 도착해서 3일간의 격전후 2차전 마지막 대국인 제 10국부터 포함해서 제 13국까지 이번 대회에서 총 4연승을 기록한 이창호 구단은 마지막 결전으로 왕시와의 대국을 합니다.

 

< 2005년 2월 26일 농심신라면배 제 3차전 제 14국(최종국)> 흑 : 이창호 구단 (한국) 백 : 왕시 오단 (차이나)

2월 26일 드디어 제 14국이 열립니다.

위 사진이 왕시와의 마지막 대국 모습입니다.

 

<실전보> 이창호 구단의 준비된 포석 - 1 ~ 39

 

이 바둑이 끝나고 나서 지켜보던 아마추어들과 프로들의 입에서도 이창호 구단이 정말 기풍이 달라졌다는 말이 많이 나왔죠. 적극 전법을 과감히 구사하고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입니다. 그렇다는 부분은 저 역시 지켜보면서 적극적인 모습을 과거보다 더 많이 본 느낌이라서 그렇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실은 더 큽니다. 이창호 구단의 데뷔 초반 - 80년대 중후반 - 의 기풍은 두텁고 느리면서 그런 두터운 세력바둑을 둔다는 평이었습니다. 원래 이창호 구단은 두터움이 뿌리였고 그런 두터움이 세력에서 발휘가 되던 시기였다는 거죠.

그 이후 참 많은 모습을 보아왔지만 두터움이 뿌리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디서 누구와 어떤 승부를 하느냐에 따라 참 많은 변화를 봐 왔습니다. 조훈현 구단과의 수많은 대결속에서 불리할 때의 응수타진과 노림도 많이 봤었고 조금씩 조이는 힘을 보기도 했으며 상대를 끝낼 수 있을 때조차 참는 모습도 많이 봤었고 - 이건 아마 모두들 기억하실듯 - 유창혁 구단과의 어느 승부에서 조금 남는 바둑임에도 불구하고 패를 걸어들어가는 모습도 기억합니다. 많은 끝내기에서 누구보다 깊은 수읽기를 본 적도 있었고 위빈과의 어느 판에서 상대의 선수 젖혀이음을 악수로 만들며 일부러 두점을 잡혀주고 선수를 잡아 역전했던 바둑까지도 기억합니다. 그가 끝내기의 이창호라는 선입관을 벗어나서 넓게 보자면 그는 그 판에서 가장 좋다고 판단하는 데로 갔으며 그것이 세력이든 실리든 이미 그런 구분을 뛰어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창호 구단이었다는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이 판과 그리고 그전 며칠간의 대국들도 굳이 변했다는 표현을 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것은 오직 한 문장. 이창호식으로 뒀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가지 점은 제 예상밖이었습니다. 하나는 이 대국에서 흑을 잡고 둘 경우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 포석 구상을 미리 해 왔다는 점 - 국후 이창호 구단이 스스로 그렇게 말했죠 - 과 위 기보에서 39로 바짝 다가서며 압박해 들어간 수였습니다. 다른 기사가 두었다면 무심히 지나갔겠지만 이창호 구단이 초반에 저렇게 적극적인 수로 압박해 들어갈 줄은 상대방인 왕시도 예상치 못했을 듯 한데요.

 

<실전보> 1~56

 

이창호 구단의 39에 대해 왕시 오단이 3,3인 백 40으로 받고 이후의 진행입니다. 백이 56으로 뛴 수는 프로의 바둑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었죠. 아마추어 하급들의 바둑에서야 저런 수는 상대가 끊어 왔을 때 생각을 하느리 함부로 못두는 수지만 프로의 바둑에서야 저런 곳을 흑이 마구 끊는다는 것은 함정에 빠지는 수이므로 둘 수가 없죠. 적어도 지켜보면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전보> 예상치 못한 강수 - 흑 61

 

이창호 구단은 흑 D,15 백 C,13을 교환하고 난 후 흑 61(흑 세모)로 정말로 나와서 끊어버렸습니다. 두번째로 놀란 수입니다.

 

<실전보> 왕시의 응수타진 - 백 66

 

이후 바로 백이 G,15로 단수치고 흑이 뻗고 백이 G,17로 내려서고 그런 전투는 백이 안되는 모양이었나 봅니다. 왕시는 고민하다가 변화구를 던집니다. 백 M,15로 붙이고 흑이 위로 젖혀받자 다시 백 세모로 붙입니다. 왕시의 수읽기가 좋아보이는 장면입니다. 흑이 백의 저 붙인 수에 그대로 잡자고 K,15로 위로 젖혀 받는다면
 

<참고도>

 

이후 진행이 될 수 있는 참고도입니다. 흑이 1로 위에서 받으면 백이 구상한 참고도죠. 백이 하변에서 크게 살면 흑은 껍질만 남아서 손해겠죠. 왕시가 양쪽에 붙인 수는 이런 구상을 담고 있었던 거죠.

 

<실전보> 이창호 구단의 두터운 단속 - 흑 77까지


그렇게 이창호 구단은 위 실전보의 백 66수에 대해 직접 받지 않고 좌변을 조인다음 흑 77수(흑 세모)로 이어버렸습니다. 하변에서 백이 살아가려면 살아가라는 수죠.

 

<실전보> 드디어 누구에게도 보이는 중앙의 흑 세력의 완성 - 흑 95

그리고 백이 조그맣게 살아갈 때 하변을 틀어막고 백이 J,5로 서둘러 두자 J,7로 중앙 세력을 완성시킵니다. 드디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웅장한 흑세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세력을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바둑 격언이 있는데 이창호 구단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한 대목이었습니다. 세력을 쌓아서 그걸 집으로 만드는데 급급하는 건 아마추어 중에서도 하수바둑이고 지는데 지름길이죠. 제가 이 대목에서 궁금했던 건 중앙 흑세를 바탕으로 이창호 구단이 백을 압박하는 전술이란 것이 어떤 수들로 나타날지 그것이 기대감을 자아내는 그런 흥분이었습니다.

 

<실전보> 귀의 맛? - 흑 155

 

이후 꽤 수가 진행된 모습인데 위의 흑 마지막 수에서 다시 긴장감을 느꼈죠. 3,3에 꽤 여러 수 전에 응수타진을 하고 맛만 남겨두었던 곳인데 흑이 155로 둠으로써 그 맛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은 저 흑을 못잡으면 집부족이죠. 잡긴 잡아야 하는데

 

<실전보> 완연해지는 우세 - 흑 191까지

 

좌상귀의 결과는 패였습니다. 그리고 이창호 구단은 그 패의 댓가로 위 흑 191(흑 세모)로 백 7점을 끊어잡아 완연한 우세를 보여줍니다. 초반 적극적인 압박과 나와끊는 수로 확보한 우세. 중앙 흑세의 완성. 흑 세력을 바탕으로한 압박과 좌상귀에서의 패. 패의 댓가로 얻어낸 완연한 우세. 무엇 하나 부족함없이 완승을 보여준 대국입니다. 이 바둑은 여기서 완전히 끝나버렸습니다. 이후 100여수 가까이 왕시가 물고 늘어지지만 이미 버스가 떠나고 난 뒤에 손 흔들기.

그렇게 모든 판이 끝났습니다. 전설의 무대가 열린지 두달후에, 잠시의 휴식을 가지고 다시 맞게된 공연. 그 무대는 기대감도 컸고 많은 사람들이 무대가 밝혀지기 전부터 많은 말을 했지만 막상 무대가 열렸을 때 저는 너무나 전과같은 모습으로 서 있던 이창호 구단의 모습에 놀랐고 그런 그의 모습에 그 전의 모든 흥분과 기대감조차 마치 과거의 일처럼 잊어 버리고 이미 담담하게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고 그 전설의 여정이 끝나고 무대 커튼이 내려지는 걸 보면서 흥분에 들떠 소리치는 모습이 아니라 잔잔한 여운만 느끼는 스스로의 모습에 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의 전설은 끝났고 우리는 이제 또다시 새로운 전설의 무대를 기대하며 살아가겠지요. 그는 아직도 젊고 새로 만들 전설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전설의 끝'을 보면서도 그것이 이창호의 끝이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담담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창호 구단이 팬이 된 까닭은 그가 바둑 실력이 뛰어난 넘버 1 플레이어라서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바둑계에서 일인자는,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바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은, 또 누군가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 그가 지금 일인자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고 순진한 성품을 가져서도 아닙니다. 성품으로만 따진다면야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제가 그의 팬이 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혼신의 모습에 매혹되어서입니다. 이창호 구단도 보통 인간입니다. 돌부처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닙니다.

 

이번 농심배에서 그가 보여준 기량은 물론 다른 일류 기사들과 이창호 구단간에는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보여준 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십년전 혹은 수백년전의 일인자와 다른 기사들간의 격차처럼 접바둑 수준의 격차가 아닙니다. 대국중 수백수를 두는 가운데 한두수로 명암이 교차하는 그런 살얼음판 위의 승부입니다. 그런 어려운 순간 순간들 그의 마음속에 존재했을 수많은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을 그는 헤치고 나왔고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무엇이 혼신을 다하는 모습인지를 또다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모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험한 눈보라와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온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팬들이 그를 마중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그도 먼 길을 마중나온 사람들의 환영에 눈물을 흘리는 보통 인간이었다.


<사진 출처 - 사이버오로>



주진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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