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0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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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프로야구 4] 스마일 허슬플레이어, 송구홍 (2)

기사입력 2005.02.17 11:38 / 기사수정 2005.02.17 11:38

김광수 기자



아쉬운 94년 선배와 후배에 밀린 전천후 내야수, 그리고 아픈 기억


93년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시즌을 마감한 LG는 94년 신구가 완벽하게 조화되어 초반부터 독주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여 돌풍을 일으킨 태평양을 4승 무패로 잠재우고 한국시리즈 패권을 거머쥡니다. 3년안에 우승권으로 만들겠다던 이광환 감독의 목표가 들어맞았던 셈이었죠. 하지만 이 우승의 중심에 그는 없었습니다. 방위복무와 부상으로 단 한 경기에도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할까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유지현 선수의 대활약과 지금도 대형 트레이드라고 불리는 LG와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상훈-한대화 선수의 트레이드 그리고 박종호 선수와 이종열 선수의 급부상은 지난 3년간 팀의 부동의 주전 내야수로 활약한 그의 자리조차 위협받게 됩니다. 한대화 선수는 트레이드 되자마자 우승을 두 번이나 경험한 특이한 기록도 남깁니다. 


3루를 노장 한대화 선수에게 유격수 자리를 유지현 선수에 마지막 희망인 2루 마저도 박종호 선수에게 밀린데다 방위복무라는 엎친데 덮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전천후 백업 내야수로 밀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땜질용이었죠. 그러나 그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95년 그는 57경기에 출장 .260의 타율에 44안타 1홈런 19타점 8도루로 94년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랩니다. 하지만 그에게 95년은 생각하기도 싫은 한해였습니다.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LG에 경험이 많은 선수였고 제대까지 한 그가 주전 3루수로 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상대는 92년에 이어 또 다시 기적을 노리는 롯데. 잠실에서 1승 1패를 기록하고 내려간 사직, 6-3으로 리드하고 있는 7회 1사 만루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마해영 선수가 친 땅볼을 급하게 홈으로 승부하다 그만 홈으로 쇄도하던 김민재 선수의 등에 맞힌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돼 동점을 허용하게 되었고, 결국 패배합니다. 이후 기세가 오른 롯데는 4승 2패의 성적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그가 선수 생활하는 동안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되찾은 주전, 그러나 후배에 밀려 떠돌다


96시즌 개막과 동시에 부상으로 시즌을 접었던 박종호 선수를 대신해 그는 2루수로 전향합니다. 당시 송구홍 선수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탓에 늘 무리한 연습이 잔부상을 몰고 다닌데다 항상 결정적일 때 저지르는 그의 수비실책 탓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영양가 없는 타력에 팬들은 그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광환 감독이 그를 너무 편애해서 다른 좋은 선수들이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었죠. 하지만 그는 이런 비난을 불식시키기도 하듯 96년 109경기에 출장, 91안타 7홈런 38타점 17도루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한대화 선수의 쌍방울 트레이드와 이종열 선수가 부상으로 시즌 자체를 접은 97년 그의 주전 3루수는 따논 당상이나 다름없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중고신인 신국환 선수에게 그는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당시 신국환 선수의 표정을 두고 항상 웃음을 짓던 송구홍 선수와 비교하던 것이 생각이 나는군요. 96시즌 말부터 대타요원으로 가능성을 보여주던 신국환 특이한 타격폼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LG의 주전 3루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 95년에 이어 또 다시 땜질용 선수로 전락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는 정삼흠 선수의 은퇴와 이상훈 선수의 해외 진출로 마운드 보강이 절실했던 팀사정상 이병석 선수와 함께 해태로 트레이드 됩니다. 당시 LG가 받은 선수가 김동호, 박철웅 선수였는데 그들이 보인 활약을 보면 LG가 한참 밑지는 장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으로 진출한 이종범 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데려온 송구홍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쳐주게 됩니다. 여전히 수비가 불안했지만 97년 그는 80경기에 출장 .288의 타율에 76안타 9타점 7도루로 녹록치 않은 기량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그의 실수와 영양가 없는 그의 타격은 확실한 주전으로서는 뛰지 못하게 됐고 결국 유격수 갈증에 시달리던 해태는 오봉옥, 박계원 선수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그와 함께 청각장애인으로 투혼을 보여준 박재용 선수를 쌍방울로 트레이드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쌍방울은 존폐기로에 서있던 팀이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의 기량이 발휘될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206의 초라한 성적표를 남기고 99시즌이 끝나고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팀에서 방출 당하게 됩니다.


다시 찾은 친정팀, 아쉬운 은퇴


어떻게 보면 그가 그 때 은퇴를 하는 편이 본인에게는 나은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명운동까지 전개한 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다시 불러준 친정팀에 입단,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지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뛰고 또 뛰었지만 탄탄한 LG 내야진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1군과 2군을 오르내리며 가끔 대수비나 대타요원으로 뛰는게 고작이었습니다.


2군에서 와신상담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송구홍 선수는 정말 생뚱맞게 유니폼을 벗게 됩니다. 조인성 선수와 김정민 선수의 부상으로 안방 살림에 비상이 걸린 LG는 부랴부랴 신생팀인 SK로부터 안재만 선수를 내주고 장재중 선수와 유현승 선수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본의 아닌 피해를 입게 됩니다. 당시 KBO의 팀당 등록 선수가 63명이었는데 2:1 트레이드로 인해 등록 선수가 1명이 초과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된 것입니다. LG 입장에서는 나이도 많고 잔부상에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그를 방출 대상 1호로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임의탈퇴 형식으로 유니폼을 벗게 됩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2~3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있었는데도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준 격이 되버렸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겸허히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는 LG 트윈스의 미래를 이끌어갈 선수들을 조련하는 코치로 변신했습니다. 선수 생활에서 보여주었던 허슬플레이를 코치 생활에서도 보여주고 있다는 반가운 기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수생활 내내 후배에게 자리를 내줘야만 했지만 그 때마다 밝은 표정과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허슬플레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송구홍 선수. 이젠 지도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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