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5.02.17 11:37 / 기사수정 2005.02.17 11:37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플레이는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비록 그것이 실수와 직결된다 하더라도 팬들은 결코 그들을 비난하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사랑을 받게 되죠. 그의 결정적인 실수가 우승을 놓쳤지만 그래도 그는 팬들의 마음속에 밝은 선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 서면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경기에 임했던 로보캅 송구홍 선수입니다.
국가대표로 활약 LG에 입단하다
건국대학교 재학시절 그는 4년 내내 주전 3루수 자리를 꿰차며 88올림픽 때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강기웅, 김동수 선수 등과 함께 국가대표로 선발됩니다. 하지만 본인은 부상으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4위에 그치는 성적표를 쥔 팀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후 그를 괴롭혀온 잔부상은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따라오게 되죠) 대학야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그는 졸업반이던 1990년 계약금 5천만원, 연봉 1천2백만원에 LG와 입단계약을 체결,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당시, 송구홍 선수가 꽤 큰 금액으로 LG 유니폼을 입게 되었지만 그의 입단이 그렇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뛰어난 쌍방울의 창단과 대형신인들이 많이 입단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91년 당시 입단한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꽤 화려하군요. 과연 송구홍 선수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LG : 송구홍, 김기덕 - 삼성 : 윤용하 - 해태 : 오희주
- 빙그레 : 양용모, 임주택 - 태평양 : 염경엽 - OB : 김익재, 김상진
- 롯데 : 김태석, 박정태, 전준호 - 쌍방울 : 조규제, 김기덕, 김기태, 김원형
* 입단했던 선수 중 프로에서 활약을 보인 선수만 게재하였습니다.
특히 롯데와 쌍방울 쪽의 선수들이 돋보이네요. 아무래도 신생팀이라 지명권에 어드벤테이지를 줘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김상진 선수는 연습생으로 입단하지만 이후 에이스로 활약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송구홍 선수는 “대어”는 아닌 “수준급”의 선수로 LG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주전 내야수로서의 3년
사실 마땅한 3루수감이 없었던 LG에게 송구홍 선수의 입단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습니다. 입단 첫해부터 무주공산이었던 3루수 자리에 그가 주전으로 발탁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구요. 하지만 그는 많은 팬들과 코칭스탭의 기대와는 달리 잔부상을 몰고 다니며 겨우 73경기에 출장 41안타 타율 .236에 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둡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91년 LG는 90년 우승팀이라고 할 수 없는 최악의 부진으로 7위에 그치고 맙니다. 우승 당시 활약을 했던 많은 선수들이 부진했기 때문이었죠.
절치부심하여 맞이한 92년 그는 정확하게 홈런과 도루를 20개씩 기록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됩니다. 그가 기록한 최고의 시즌이었습니다. 팀은 성적이 곤두박질 쳤지만 그의 활약은 한마디로 군계일학이었습니다. 단거리 타자의 전형이었던 그도 92년을 회상하면 어떻게 20개의 홈런을 쳐냈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93년에는 그는 포지션을 이동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2년 연속 7위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LG는 92년부터 이광환 감독의 취임 아래 전열 재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던 LG는 수많은 루머를 불식시키고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자율야구가 점점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LG는 한 때 거의 독주하다시피 했던 해태를 턱밑까지 추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판 뒷심부족으로 2위마저 삼성에게 내주고 마지막 경기에서는 3위 자리마저도 라이벌 OB에게 내주고 맙니다. 이광환 감독은 그 이유를 막판 송구홍 선수와 이상훈 선수가 아팠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송구홍 선수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가 팀전력의 핵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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