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3.24 11:06 / 기사수정 2008.03.24 11:06
[엑스포츠뉴스=홍준명 기자] 박지성이란 이름은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언제나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중국은 이전에는 박지성을 무척이나 시기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는 박지성에 대한 인정과 칭찬이 더 많다. 결국,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 실력으로 중국언론조차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이다. 한·중·일의 축구에 관한 내용을 방송하는 한 프로그램에서 박지성의 어린 시절과 현재 한국에서 박지성의 위치와 영향력 등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가 지난 22일 중국 '시나스포츠'에 실렸다.
그 기사의 제목 중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女有大長今, 男有朴智星', 즉 여자는 대장금, 남자는 박지성이 있다는 뜻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남녀로 대장금과 박지성을 꼽은 것이다. 기사는 매우 길다. 다음은 기사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 여자는 대장금, 남자는 박지성이 있다. 그는 어떻게 맨유 1군의 스타가 되었는가!
한 여인이 노력을 거듭하여 주방에서부터 어의까지 올라가는 내용의 TV연속극인 '대장금'은 중국에서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장금이의 그러한 진실함, 성실함, 단결심, 역경에서도 굳건히 버텨나가는 모습들에 대해서 가장 탄복한다. 이는 한국의 전통 미덕을 나타낸 것이며 또한 현재의 한국인들도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축구 삼국'이라는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우리는 특별히 한국을 방문했다. '대장금'의 야외세트장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다.
"여자는 대장금, 남자는 박지성이 있다."
이는 한국의 고대 여성의 대표와 현대 남성을 나란히 말한 것인데, 박지성은 바로 한국축구계의 젊은 세대 중의 스타선수이다.
'대장금' 세트장을 떠난 후 우리는 120km 떨어진 강원도 춘천으로 가서 박지성과 이영표의 축구입문시기의 은사인 김철수(강원도 반비축구단 감독)씨를 만났다. 그는 내내 강원도 보육원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오후 훈련이 비로 인해 취소되었고 최근 보육원의 한 직원과 마찰이 발생하여 직접 보육원에서 촬영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한 커피숍에서 그와 만났고 그는 어린 시절 박지성과 이영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두 제자의 이름을 말하면서 오래전의 일들이지만 아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막힘없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박지성이 자신의 축구학교에서 정규훈련을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 박지성의 신체조건은 아주 일반적이었으며 여위었으며 마치 쥐같이 생겼었다고 했다. 그래서 모두 그에게 '미키마우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박지성은 매우 빠르게 발전해나갔는데, 비록 신체조건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왜소했으나 매우 진지했고 열심히 했기에 그는 경기장에서 언제나 주장완장을 찼었다고 했다. 1992년 박지성은 차범근상 대상을 수상했다.
1981년생인 박지성은 지난 세기 80년대 말부터 전문적인 축구훈련을 시작했다. 이때는 또한 한국축구가 막 준프로화를 실시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축구는 청소년 육성방면에서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즉, 기업이 투자하여 클럽을 만들고 클럽은 다시 하부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아래에는 또 축구학교가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선 축구학교에서 아마추어적인 훈련을 했고 그 중에서 좋은 새싹들은 다시 클럽소속의 하부 팀으로 선발되었다.
4년 전부터 한국의 만은 클럽들은 모두 축구학교에서 12세의 선수들을 선발하기 시작했고 최종 15명을 추려내었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중점적인훈련을 한 후 일부 우수한 선수들은 소속클럽에 남고 다른 일부 선수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5년 우리는 남양축구학교의 정기윤 감독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대한축구협회 초등학교연합팀을 이끌고 중국 쿤밍에서 열린 국제 소년요청전 대회에 참가했었다. 이 팀의 선수들도 바로 몇몇 축구학교에서 뽑힌 선수들이었다. 정기윤씨는 한국의 축구학교들은 축구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모두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남양축구학교 같은 곳이 200여 곳이 있는데 학비도 저렴하다고 했는데 인민폐로 환산하자면 적게는 백 위안(한화 약 만 삼천 원), 일반적으로는 이백 위안이 넘지 않으며 가장 비싸도 팔백 위안(한화 약 십만 원 안팎) 정도라고 했다.
김철수씨는 지금도 유소년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박지성을 가장 많이 언급했다. 박지성의 성실한 성품에 대해 김철수씨는 아무리 말해도 물리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는 박지성은 매우 고집이 센 아이라고 했다. 감독이 농담을 해도 그는 그것을 진담으로 여겼기에 거기에 마음대로 말하지도 않았었다고 한다.
언젠가 박지성의 부모가 김철수씨를 보러 왔다. 그때 주장인 박지성은 감독에게 무엇을 할지 물었는데 김철수씨는 농담으로 박지성에게 한쪽으로 가서 엎드려있으라고 했다. 그 후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박지성은 그때까지 울면서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에 김철수씨는 정말로 놀랐다고 했고 박지성의 부모도 옆에서 마음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밌어했다고 한다. 박지성의 아버지는 "박지성이 그토록 완강하고 고집이 센 줄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라고 김철수씨에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축구훈련 중, 어린 선수들에 대한 성실한 교육은 시종 굳건한 것이다. 중국팀과의 경기에서 정기윤씨는 그런 방면에서 한국과 중국은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코치진들은 선수들이 전력을 다하는지 아닌지 척 보면 알 수 있어서 선수들에게 한 발만 더 뛰면 볼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해주지만 중국팀들은 이런 경우 비교적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청소년 선수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훈련을 하면 그 영향은 성인이 된 후의 훈련태도에서 서서히 나타난다. 또한, 그 훈련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중 양국의 최정상급 클럽에서 오랫동안 감독을 했던 이장수 감독 역시 이에 대해 느낀 바가 깊다.
이장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 운동량이 많은 훈련에 대해 대부분의 중국 선수들은 거절하려고 한다. 그 태도에서도 그렇고 또한 실제로 훈련을 해도 그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선수들은 설사 원하지 않더라도 감독의 요구에 따른다. 예를 들자면, 훈련의 목표가 100이라고 할 때, 한국선수들은 100에 도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스스로 반드시 100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다. 반면 중국선수들은 70~80만 도달하면 이미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성실성과 버텨나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박지성의 축구수준은 빠르게 높아졌다. 18세에 그는 한국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대표팀에서 박지성과 한국팀은 모두 순탄 서럽지는 않았었다. 2000년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 박지성의 한국팀은 중국과 이라크에 패하면서 세계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당시 한국팀의 골문을 뚫었던 중국의 취보(Qu Bo)는 박지성보다도 더 아시아 언론들의 조명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후 그 둘의 발전궤적은 갈수록 멀어졌다. 2002년 취보는 중국대표팀 소속으로 한일월드컵에 참가했지만 교체선수로 적은 시간만 출전했었다.
반면 박지성은 자신의 고향에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2002년 6월 11일, 박지성은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포르투갈의 바이아 골키퍼가 지키는 골문을 뚫었고 그 골은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이 되었으며 한국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게 한 골이었기도 했다. 결국, 박지성은 한국의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창조를 도운 것이다.
지금도 수원 월드컵경기장의 대문에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구가 여전히 눈을 끌고 있다. 경기장의 홀은 이미 2002년 월드컵 기념관이 되었으며 정문 우측에는 박지성 기념관이 있어서 박지성의 축구성장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박지성은 한국의 민족의 영웅이 된 것이며 또한 아시아의 축구팬들도 모두 알게 되었다. 박지성 기념관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각국의 여행객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는 많은 중국 여행객들도 있었다.
한국의 월드컵 기적에 일조한 박지성은 그 후 또 다시 한국의 2004년 올림픽 본선진출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아시아지역예선에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때 이미 큰 그릇이었던 박지성은 한국 올림픽팀의 절대 주전이었다. 반면 한 때 바람을 가르는 소년이었던 취보는 이미 중국 올림픽팀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박지성은 한국이 중국을 두 번 이기는 데에 일조했고 한국은 아테네행 티켓을 따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둔 후 박지성은 금세 한국언론과 축구계의 우상이 되었다. 그가 해외에서 돌아올 때마다 모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박지성은 프로선수의 길에서 자주 새로운 비약을 거듭했으며 2005년 그는 잉글랜드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성공적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한순간에 한국축구계는 또 다시 박지성 붐이 물결쳤다. 2005년 6월 수원시는 박지성 길을 만들어 그의 성취를 축하했다. 박지성이 도로 명명식에 참가해서 테이프를 커팅할 때 전에 없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당시 한 팬은 도로의 이름을 박지성 길로 개명하는 것에 대해 매우 지지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인품과 축구실력 모두 뛰어난 박지성을 모범으로 하면 한국의 아이들이 각각의 방면에서 박지성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박지성 붐'은 이미 축구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국의 한 패션잡지를 본 적이 있는데 표지에는 상처투성이의 발 사진이 있었다. 바로 박지성의 발이었다. 이런 결코 아름답지 않은 발이 패션잡지의 표지에 등장한 것이었다!
박지성 기념관에서 박지성 길까지, 영웅을 숭배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이미 시대의 풍조가 된 것임을 설명하는 데에는 아마도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전에 무수히 들어왔던 한국축구의 '정신력'은 이미 한국의 각계인사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시나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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