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베컴(32, LA갤럭시), 그가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언론은 소박한 그의 운동복 차림부터 그의 매력적인 미소, 겸손한 말투까지 베컴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잡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빼어난 외모로 축구선수 중 유독 팬이 많은 베컴은 어딜 가나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
그러나 베컴에 대한 평가, 특히 그의 축구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립니다. '최고의 스탠딩 미드필더', '세계 정상급의 프리키커'라는 수식어가 늘 베컴을 따라다니지만, 그는 또한 '발이 너무 느리고 활동량이 적다', '축구선수가 아니라 모델 같다'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축구선수 중 대외활동이 가장 활발한 선수이기에 축구외적인 측면에 치중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고는 합니다. 잘생긴 외모는 그에게 많은 여성팬을 안겨주었지만, 베컴에게 그 여성들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일부 남성 축구팬을 '안티'로 만들기도 하고요.
베컴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가 쌓아올린 '기록'입니다. 그는 늘 트로피와 함께했고,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결정적인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기록 중에는 레드카드와 같은 - 너무나 유명한 98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레드카드처럼 -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있지만, 그 역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을 이루는 일부일 것입니다. 베컴의 방한을 환영하며, 잠시 그의 축구인생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팬에서 선수로, 11년 '맨유맨' 베컴
1975년, 베컴은 런던에서 열정적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인 테드 베컴과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를 따라 종종 런던에서 올드 트래포드까지 여행을 하곤 했던 베컴은 자연스럽게 맨유의 팬이 되었고, 1991년 유스 계약을 맺을 때에도 주저 없이 맨유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베컴의 인생이 트로피와 함께였다고 얘기했는데, 그가 들어올린 최초의 트로피는 1992년 FA 유스컵 우승 트로피입니다. 유스팀에서 두각을 나타낸 베컴은 그 해 리그컵 경기에 후보 선수로 출장했고, 곧 맨유와 정식 프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유스팀과 리저브팀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던 베컴은 1994년 리저브팀에서 리저브 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걸며 두 번째 우승을 경험합니다.
94/95 시즌 프레스턴으로 가 잠시 임대 생활을 했던 베컴은 팀의 주축선수들이 떠나면서 생긴 빈자리를 메우는 신예 선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당시 퍼거슨 감독이 전격적으로 기용한 유스 출신 신예 선수들이 바로 게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그리고 베컴입니다). 베컴은 95/96 시즌 개막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팀이 아스톤 빌라에 3-1로 패하면서 신예 선수를 무리하게 기용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결정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신예 선수들은 재빨리 팀에 적응했고, 개막전 이후 다섯 경기에서 연승을 거두며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베컴은 그 중 하나였고, 결국 그는 94/95 시즌 맨유가 프리미어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베컴이 유명세를 탄 것은 96년 8월, 윔블던을 상대로 환상적인 골을 기록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하프라인 선상에서 주저 없이 슛을 했고, 공은 골키퍼를 넘겨 멋지게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이 골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골을 꼽을 때 항상 언급되는 골이기도 합니다.
당초 10번을 달고 활약했던 베컴은 테디 셰링엄이 팀에 합류하며 자신의 번호를 셰링엄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대신 그는 에릭 칸토나가 은퇴하며 남긴 7번을 이어받게 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베컴은 칸토나의 명성을 이어받기 역부족인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7번을 곧바로 베컴에게 넘겨준 퍼거슨 감독의 결정은 팬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베컴이 맨유의 상징이자 '7번' 하면 떠오를 선수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98 월드컵의 악몽(뒤에 다시 언급할 예정입니다)을 딛고 활약한 98/99 시즌에 베컴은 맨유의 트레블(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동시우승)을 견인하며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냅니다. 베컴은 중앙 미드필더 자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뉴캐슬과의 FA컵 결승전,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습니다. 베컴은 특히 역사적인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극적인 역전의 발판이 된 두 번의 코너킥을 직접 찼고, 그 공은 셰링엄과 솔샤르의 발을 거쳐 골이 되었습니다. 베컴의 인생에서, 그리고 맨유의 역사에서 98/99 시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죠.
그러나 이후 맨유에서의 베컴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좋은 선수였고, 실력으로 인정받는 선수였으며 연이은 맨유의 리그 우승에도 기여했습니다만, 특정 선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퍼거슨 감독과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입니다. 2000년의 어느 날, 베컴은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훈련에 불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그날 밤 런던의 한 패션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빅토리아가 아이를 보고 베컴은 훈련에 참가했어야 했다며 베컴에게 팀 내 최고 징계인 2주 주급 삭감 처분을 내렸고, 당시 맨유의 중요한 라이벌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 베컴을 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잦은 부상으로 베컴의 팀 내 입지가 줄어들던 차,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2003년 2월 아스날과의 경기에 패한 직후 퍼거슨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라커룸에 있던 축구화를 차버렸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그 축구화는 베컴의 눈을 향해 날아갔고 이 일로 베컴은 눈두덩이에 상처를 입어 꿰매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드라마 '왕과 나'를 연상시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언론은 베컴의 이적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02/03 시즌, 맨유는 아스날을 누르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컴에게는 맨유에서의 마지막 우승컵이었습니다. 이따른 불화를 겪던 베컴은 11년간 몸담은 맨유를 떠나 2003년 7월 1일, 2500만 파운드의 이적료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합니다. 프리미어리그 265회 출장 61골, 챔피언스리그 81회 출장 15골, 6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2번의 FA컵 우승과 1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1번의 대륙간컵 우승과 FA컵 유스대회 우승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기고.
내일은 베컴의 파란만장했던 대표팀 경력과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의 그의 행보에 대해 정리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