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유진 기자] "특별히 어떻게 했다는 것보다도, 제가 가진 능력의 범주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제일 정답이 아닐까요."
배우 송강호의 묵묵한 정진이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 자리매김했다.
9월 7일 개봉한 '밀정'에서 송강호는 현실의 생존과 애국의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로 분해 입체적인 연기를 펼쳤다. '밀정'은 개봉 후 박스오피스 정상을 수성하며 700만 고지를 넘어섰다.
영화를 본 관객들 역시 송강호가 아닌 이정출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밀정' 속 송강호가 남긴 잔상은 강렬했다.
송강호는 '밀정'을 선택한 이유로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새로움이죠. 소재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똑같은 얘기라도 어떤 시선으로 역사나 사건, 인물을 보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이 소개됐지만, 제게는 '밀정'만이 갖고 있는 깊이감, 시선이 다른 작품과는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송강호는 이정출이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냐"고 말한 대사를 떠올리며 '밀정'의 색깔을 '회색'으로 표현했다.
"좌절의 시대고, 그 시대에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요. 그 시대가 암울했으니까 불타는 붉은 색 아니면 어두운 흑빛 같은 느낌이 올 수도 있는데, 밀정'은 약간 회색빛의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그랬죠. 혼란스러웠던 시대였고, 혼란스러웠던 인물들도 많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정출이 아마 그 대표적인 인물이겠죠. 생존을 위해 그랬든 가치관 때문에 그랬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제게도) 이 영화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밀정' 속 이정출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때로는 카리스마 있게, 또 유머러스하게 다가오는 송강호의 연기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한 예로 이정출이 깊은 생각에 잠길 때 수염을 만진다거나 하는 모습은 설정하고 계산한 것이 아닌, 송강호가 '이정출'이라는 인물 자체가 됐기에 나왔던 행동들이었다.
송강호는 "시나리오에 그런 디테일까지는 적혀있지가 않죠. 훨씬 건조해요. 글로 적는다면 열 줄을 적어야 하는 부분이 한 줄 밖에 없기 때문에, 배우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염이나 관자놀이를 만진다거나 하는 것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 상황에 맞는 행동이 나간 거예요. 순간에 몰입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만약 그런 때에 "대사만 깨끗이 하자"는 지시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얘기를 안 하셨겠죠"라며 웃었다.
그만큼 고민을 거듭했던 시간들이었다. 송강호는 강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정출의 모습을 다양한 연기로 표현하기 위해 "좀 더 여러 방법으로 연기를 했던 것 같다. 배우 입장에선 그렇게 보여줘야, 감독이 선택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반드시 이정출에게는 '혼돈의 감정'이 느껴지길 바랐다.
"혼돈스러운 인물이고, 또 그런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외부적으로 정확하게 표현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걸 가장 중요하게 봤어요. 예를 들면 이정출이 히가시(츠루미 신고 분)에게 보고를 하는 순간도, 충성의 보고인지 보고를 하라니까 하는 건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송강호는 "세상 모든 면이 다 그렇듯 양면이 있지 않나. 이정출이라는 캐릭터도 너무나 매력이 있지만, 어려운 인물이었다"고 다시 한 번 되짚었다.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와의 조합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요소였다. 심리전으로, 또 액션으로 이들과 합을 맞췄던 송강호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는 액션은 크게 한 것이 없다"고 웃으며 "아무래도 심리적인 부분을 표현하는 게 더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액션은 하시모토와 기차에서 대립하는 것과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였어요. 심리전은 더 힘들었던 게,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입장에서 또 어느 편을 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또 김우진과 하시모토의 성격도 전부 다르잖아요. 논리적인 김우진과 불같은 하시모토, 두 사람을 대하면서 그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어려웠지 않나 싶네요."
'밀정'을 촬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서대문형무소를 처음 방문했던 기억도 남아있다. 그 때의 울컥하고 착잡했던 마음을 떠올린 송강호는 "상해임시정부청사에서는 독립투사 분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포박을 당한 채 가는 사진이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분들이 아니었어요. 또 기온이 영하 십 몇 도까지 떨어졌던 아주 추운 날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을 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보다 더 혹독한 환경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있다 돌아가신 분들이 계신 거잖아요. 그런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하니 경건해지는 마음이 많이 들더군요"라고 말을 이었다.
송강호는 "김지운 감독이 아주 풍성하고 깊이 있게 완성해줬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밀정'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향해 이어지는 연기력 극찬에 겸손하게 손을 내저은 그는 "어떤 배우든 '난 이제 됐어, 만족해'라고 생각하는 배우는 없을 거라고 봐요. 개인적으로 연기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죠. '밀정'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작품이 그렇습니다"라고 차분하게 답했다.
매 해 꾸준히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 송강호는 차기작 '택시운전사'와 '제5열'로 다시 신발끈을 조여매고 나선다.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밀정'의 여정. 송강호는 "'밀정'이 어느 정도는 남다른 위치의 작품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제 바람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매 작품이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됐으면 합니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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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기자 slowlif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