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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논어와 스포츠] '1986 차범근과 2013 손흥민'…홍心 어디로 가나

기사입력 2013.08.20 12:12 / 기사수정 2013.08.20 12:13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장원재 칼럼니스트] 홍명보 감독이 독일로 갔다. 구자철(볼프스부르크) 박주호(FSV 마인츠 05) 손흥민(레버쿠젠) 등을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라 한다. 홍감독의 A매치 성적은 네 경기 1득점이다. 팬들의 관심은 그래서 손흥민에게 쏠려있다. 분데스리가 공격수 중 최고의 유망주. 2008년 함부르크 16세팀 입단, 2010년 1군 데뷔, 2012/13 시즌 12골 2도움. 그가 과연 골가뭄에 시달리는 홍명보 호의 공격선봉장이 될 수 있을까. 기록만 놓고 보자면 손흥민의 성적은 전성기 박주영의 업적을 능가한다. 문제는?

홍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낮춰 팀에 도움을 주는 선수가 있고, 자기만 잘하려고 하는 선수가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모델이 박지성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샘플은 손흥민? 홍감독은 아시안게임에, 올림픽 팀에 단 한 번도 손흥민을 선발하지 않았다. 잠시 시계를 27년 전으로 돌려보자.

1985년 10월 26일 도쿄에서 대한민국은 정용환, 이태호의 연속골로 일본에 2-1 승리를 거뒀다. 11월 3일, 잠실 대첩에선 61분 골대를 튕긴 최순호의 왼발슛을 허정무가 뛰어들며 골로 연결, 일본을 1-0으로 물리치고 3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월드컵 티켓을 기어이 손에 넣었다. 전 국토가 열광의 도가니처럼 끓어오르던 바로 그 순간, 대한축구협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차범근 딜레마. 차범근을 대표팀에 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차범근은 자타가 공인하던 비유럽 비남미 출신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고민은 기량문제와는 다른 각도에서 시작되었다.

82년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은 1차예선에서 짐을 쌌다. 81년 4월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이 쿠웨이트에 모여 단일리그로 벌인 결과물은 쿠웨이트 3승, 한국 2승1패. 대한축구협회는 차범근의 합류를 요청했지만 프랑크푸르트 구단은 한마디로 딱 잘라 이 제안을 거절했다. FIFA의 A매치 차출규정이 정교하지 않은 시절이었고, 시즌 막바지에 주전공격수를 2주나 빼달라는 건 무리라는 대답이었다. 문제는 차범근이 계약서에 ‘대한축구협회의 요청이 있을 경우 구단은 차범근의 한국대표팀 차출을 허락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은 계약사회였다. 계약내용이 통사정보다 우위에 있었다. 83년 레버쿠젠으로 팀을 옮기면서 차범근은 “이 조항 없이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제도적으로, 월드컵 예선 및 본선 출전이 가능하도록 길을 닦아놓은 것이다.

86년 예선 1차예선 말레이시아와의 어웨이경기를 0-1로 내주고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강을 건널 때 말을 바꾸지 말라는 격언을 거스르고 감독을 바꿨다. 이때부터 차범근 합류 이야기가 나왔다. 갑론을박 끝에, 차범근 없이 가기로 했다. 대표팀이 소속팀에 복귀하지 않고, 몇 달 씩 집단합숙을 하던 시절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경기 하루 이틀 전에 팀에 합류해서 다른 선수들과 제대로 어울려 경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당대 전문가들이 품었던 일관된 의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예선을 통과하자 국론이 갈렸다. 협회 내부의 기류는 차붐 합류에 부정적이었다. ‘예선에서 기여한 바가 없다’, ‘스타의식에 젖어 팀워크를 해칠지 모른다’ 등등. 해가 바뀌고, 86년 봄이 다 가도록 차붐 선발 건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눈에 띄게 의기소침한 차붐에게 말을 걸었다가, 독일 축구인들도 비로소 전후사정을 파악했다. 아마 포크츠 감독이었을 것이다, 차범근을 위해 총대를 맨 사람은. 독일에서 발행되는 세계 유수의 축구잡지 '키커'에 실린 그의 기명칼럼. “한국의 32년 만의 본선진출을 축하한다. 나는 한국 팀의 최근 경기를 본 적이 없다. 따라서 한국의 축구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이 점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이 차범근같은 선수를 빼고도 대표팀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이라면, 나는 86년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86년 당시의 차범근의 경기력은, 세계 어느 팀의 주전 공격수로 뽑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독일에서는 차범근을 루메니게와 동급으로 평가했다. 차붐의 한국 대표팀 탈락은 분데스리가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차붐 문제가 국제적으로 비화할 움직임을 보이자 대한축구협회는 차범근을 대표팀에 선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다.

85년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멕시코에서 열린 멕시코, 헝가리, 알제리, 한국의 4개국 초청대회. 19일 멕시코 아틀란테와의 친선경기. 86년 2월 홍콩, 파라과이와 어울린 홍콩 구정대회. 4월 2일(마산), 5일(대구), 9일(인천)등 공설운동장 세 곳을 순회한 실업선발과의 마지막 국내 평가전에도 출전선수 명단에 차범근의 이름은 없다. 월드컵 대회개막을 3주 앞둔 5월 18일 LA. 페루의 프로팀 알리 안사와의 평가전에서 차범근은 드디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다. 1978년 12월 20일, 방콕아시안 게임 결승전 대 북한 전 이후 7년 5개월만의 대표팀 복귀. 이 평가전에서 한국은 차범근, 최순호의 연속골로 상대를 2-0으로 제압한다. 허정무와 박창선으로 이어진 논스톱 패스를 받아 차범근이 상대 오른쪽을 깊숙이 돌파하고, 뛰어들던 최순호의 스피드에 맞춰 1/8 박자를 멈칫한 뒤 허리 아래 높이로 크로스, 최순호가 쇄도하던 탄력 그대로 몸을 던지며 다이빙 헤딩슛으로 득점한 두 번 째 골이 이날 경기의 백미(白眉)다. 경기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순호는 ‘차범근 선배와는 오늘이 첫 공식경기지만, 마치 20년 이상 함께 발을 맞춰온 사람처럼 편안하게 플레이했다’라고 답했다.

선수 선발권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에게 며칠 전 차범근 감독이 했다는 말을 이 칼럼 말미에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 “축구는, 아직까지는 독일이 한국보다 선진국 아닌가. 그 축구 선진국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흥민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홍명보 감독이 한 번 쯤은 숙고해 주었으면 어떨까 싶다.”

논어 미자(微子) 편에 나온다.

周公(주공)이 謂魯公曰(위노공왈) 君子不施其親(군자불시기친)하여 不使大臣怨乎不以(불사대신원호불이)한다. 故舊無大故(고구무대고)면 則不棄也(칙불기야)한다. 無求備於一人(무구비어일인)한다. (18/10)

해석) 주공이 노공에게 말했다.

“군자는 그 친족에게만 편중하지 않아 대신들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게 하지 않는다. 오래 함께 해온 사람은 큰 문제가 없는 한 버리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소생은 홍명보 감독의 팬이다. 그가 동북고 시절에 보여준 프리킥에 반해, 홍명보의 행적을 좇은지가 어언 30년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명보의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장원재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홍명보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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