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장희빈(장옥정)과 인현왕후 그리고 최숙빈. 이들 세 여인의 이야기는 길어내고 마르지 않는 우물 같다. SBS 드라마 '장옥정-사랑에 살다'에서 장희빈을 연기한 김태희가 9대 째 장옥정이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변주되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장희빈의 파란만장한 삶은 잊혀질만하면 새롭게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 1980년 이후 숙종(조선의 제19대 왕 1674~1720 재위) 시대를 뒤흔들었던 세 여인의 이야기는 6번이나 반복됐다. 2002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장희빈’까지만 해도 기존 조선왕조실록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들 여인들의 삶은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어졌다.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작품은 2010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장희빈 위주로 진행된 이야기를 탈피해 최숙빈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최숙빈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적지 않게 등장하는 장희빈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숙종 시대 인현왕후를 모셨던 어느 궁인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인현왕후전'은 조선 시대의 유명한 전기체 소설 중 하나다. 이와 비교해 최숙빈의 역사적 위상은 미비한 편이다.
전통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권력 다툼을 그리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승자가 되지 못했다. 인현왕후는 폐비가 된 뒤 다시 중전 자리에 올랐지만 왕자를 낳지 못한 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의 가장 큰 총애를 입은 장희빈은 미천한 신분(역관의 종질녀)을 극복하고 빈에서 중전까지 올랐다. 조선 시대 최고의 '신데렐라'가 됐지만 이후 숙종에 대한 끊임없는 투기와 권력욕으로 쇠망의 길에 들어선다.
두 여인이 몰락하는 과정 속에서 최종 승자가 된 이는 바로 최숙빈이다. 그녀 역시 미천한 신분(무수리 출신)을 극복하고 숙종의 승은을 입어 빈자리 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조선 시대 4대 성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조를 낳는다. '동이'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맞춰서 최숙빈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동이'에 등장한 최숙빈은 매우 착하고 현명한 여인으로 그려졌다. 아들인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검소하고 소박하고 겸손한 분이었다"라고 추억하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한낱 무수리에 불과했던 그녀가 어떻게 숙종의 눈에 띠어 승은을 입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승자'인 서인들이 남긴 역사에 의하면 "밤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기를 기도하였는데,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라고 전해진다.
이 사건이 철저한 서인들의 계략에 의해 시도됐다하더라도 스스로 이러한 충심을 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당시 인현왕후를 궁에서 쫓아낸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최숙빈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숙빈은 장희빈에 버금가는 총애를 한동안 받으며 세 명의 왕자를 낳았다. 이들 중 둘째인 연잉군은 훗날 영조가 된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48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역사적으로 ‘최종 승자’로 남았다.
그녀가 장희빈 다음으로 숙종의 사랑을 받은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말년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최숙빈은 인현왕후가 병사한 뒤 '희빈이 왕후가 살아있을 때 저주 굿을 했다'고 발고해 결국 장희빈을 자진하게 만들었다. 장희빈과의 힘겨룸에서 승리했지만 어린 아들 연잉군을 대궐에 남겨둔 채 이현궁(梨峴宮)으로 쫓기듯 거처를 옮겼다. 이러한 명을 내린 이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숙종이었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끝까지 받지 못했던 것처럼 최숙빈 역시 숙종의 마음속에 끝까지 머물지 못했다.
장희빈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그는 '동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그러나 '장옥정-사랑에 살다'는 결코 최숙빈을 위한 드라마가 아니다. 장옥정과 숙종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고 '착한 옥정이'란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가장 많이 희생당한 인물은 장희빈의 라이벌인 최숙빈이었다. 실제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드라마에서 왕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는 오로지 장옥정 밖에 없다. 또한 장옥정의 비극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기 위해 최숙빈은 악역을 맡아야만 했다.
모든 드라마가 역사에 충실해질 필요는 없다. 어떤 인물을 재조명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적 인물은 허구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동이'에서는 장희빈이 최숙빈을 위해 한걸음 물러섰고 '장옥정-사랑에 살다'에서는 최숙빈이 악녀로 변신했다.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
[사진 = '장옥정 사랑에 살다' SBS 화면 켭쳐, 동이 포스터 ⓒ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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