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이준학 기자] 예당엔터테인먼트가 지난 4일 갑자스럽게 세상을 떠난 故 변두섭 회장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예당엔터테인먼트는 5일 '잠시도 쉬지않던 영원한 '엔터쟁이' 변두섭 회장'이라는 추모글을 통해 "2013년 6월4일 연예계에는 큰별이 졌다. 국내 엔터테인먼트계의 선구자이자 큰 어른이었던 예당엔터테인먼트 변두섭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했다"고 전했다.
다음은 추모글 전문이다.
고 변두섭 회장은 매일 8시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출근하여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듣고 있었다. 해외출장을 제외하고는 1년에 단 하루도 늦게 출근하는 일이 없었다. 회장실에서 들려오는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를 듣고 변 회장이 출근했다는 사실을 직원들이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한 변두섭 회장은 음원차트 50위권의 노래를 매일 반복해서 들었다. 최근 트렌드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늘 최신음악을 미친 사람처럼 들었다. 그 음악소리가 6월 4일에 들리지 않았다.
고 변두섭 회장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음악다방에서 잡일을 하다가 DJ부스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DJ를 보며 꿈을 키웠다. 영어를 잘 몰라 당시 유행하는 팝송가사를 모두 한글로 적어 읽으며 유명DJ가 되어 활동하다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곡을 처음으로 제작하고 그의 인생도 미완성인체로 삶을 마감했다.
1984년 예당기획을 설립하여 최성수, 양수경, 조덕배 등의 가수들을 히트시키며 가요계에 등장한다. 최성수, 양수경등의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음악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다소 생소한 보사노바풍의 감성멜로디를 전한 조덕배를 발굴하여 주류 음악에 알리면서 그의 특유의 몽상가적 기질을 보여줬다.
1992년 예당음향으로 법인전환하며 그가 세상에 내놓은 음악은 90년대를 가히 휩쓸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듀스, 룰라, 김경호, 소찬휘, 녹색지대, 솔리드, 젝스키스, 임상아, 조PD, 이승철, 이선희, 이정현, 박강성, 원타임, 지누션, 서태지, 싸이 등 그에 손을 거쳐 나온 음악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고 잠쉬도 쉬지 않는 적토마였다. 인터넷 게임이 차세대 유망사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온라인 게임회사 프리스톤테일을 인수하였으며 후에 온라인 댄스배틀게임 오디션을 서비스하는 예당온라인으로 키운다. 당시 매출액 800억 원대의 중견게임사로 키웠다. 영화 친구의 제작사이자 당사 국내3대 영화 배급사를 인수하였고 지금의 CJ E&M처럼 엔터테인먼트는 미디어, 영화 등 토탈엔터테인먼트로 가야된다고 생각하고 당시 ETN TV, 예당아트TV등 미디어 3개사를 합병하며 미래를 준비하였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양현석 대표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제작자로 변신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지누션과 원타임을 같이 제작하여 제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쉬지 않고 일하였고 후배들도 도왔다.
엉뚱한 변 회장은 교포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무작정 구소련으로 향했다. 1988년 고 변 회장은 당시 인기가수인 김세레나, 양수경, 최성수, 이용식 등 연예인들을 이끌고 러시아 땅을 밟았다. 구소련의 우즈베키스탄, 알마타 등 당시 핍박받던 고려인들에게 한국인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그가 러시아에서 자원개발 사업을 하게 될 줄은 본인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에어컨도 없는 차로 20시간 이상달리며 변 회장은 대륙을 누볐다. 거기서 구소련의 개혁을 이끈 5인중 1인이었던 빅토르 최를 만나고 그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했다. 또 러시아 연주자들의 미공개 녹음 40만타이틀을 국내외에 발매하여 클래식 음악계에도 큰 선물을 안겼다.
이후 변회장은 한러문화교류 협회를 설립했다.
1994년에는 레닌그라드에서 백야 축제가 열렸는데 당시 예당 소속가수이자 변 회장의 부인인 양수경 씨가 대상을 수상했고 지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백야축제의 준비위원이었고 그는 나중에 러시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십 수 년후 그는 거기서 유전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에는 과감하였지만 자기 자신한테는 너무 인색하였던 변 회장, 그는 밥한 끼를 사서 먹더라도 5000원 이상짜리를 사먹는 경우가 없었고 이웃집 아저씨처럼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가수 이승철 씨가 너무 일을 사랑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이준학 기자 junhak@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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