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미국)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나브라틸로바의 상승세도 새로운 스타의 등장과 함께 저물기 시작했다. 1987년 당시 18세 소녀였던 슈테피 그라프(독일)는 나브라틸로바의 아성을 꺾고 롤랑가로 프랑스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나브라틸로바는 그해 열린 윔블던과 US오픈에서 그라프를 제압하며 설욕에 성공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태양'인 그라프의 상승세는 천하의 나브라틸로바마저 막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8년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나브라틸로바는 그라프를 만났지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89년에 열린 윔블던과 US오픈 결승전에서도 나브라틸로바는 그라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나브라틸로바는 "그라프는 확실히 나보다 더 잘 치는 선수다. 나보다 잘하는 선수에게 패했는데 기분이 왜 나쁘겠느냐? 그녀의 기량은 최고 수준이다"라며 그라프를 칭찬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브라틸로바는 자신의 패배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 선수'의 품격을 드러냈다.
2012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우승자인 캐롤리나 코스트너(26, 이탈리아)가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코스트너는 22일(한국시간) 미국의 스포츠 전문지인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를 통해 "김연아는 레벨이 달랐다.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라며 김연아의 압도적인 실력을 인정했다.
코스트너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23, 일본)처럼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스케이터다. 주니어 시절부터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대표할 스케이터로 기대를 받은 그는 2008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실수를 연발하며 하위권으로 추락했지만 부활에 성공했다. 특히 코스트너는 김연아가 잠시 아이스링크를 떠난 상황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등극했다. 지난해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2012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코스트너는 월드챔피언에 올랐다. 피겨 여자선수로는 꽤 많은 나이인 25세에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며 꿈을 이룬 그는 은퇴와 현역 잔류의 기로에 섰다. 올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 출전을 포기한 코스트너는 2013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번 대회에서 코스트너는 프로그램 구성점수(PCS)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총점 197.89점을 받았다. 이 점수는 코스트너 개인 최고 점수이기도 했다. 200점에 근접하는 생애 최고의 점수를 얻었지만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218.31)와의 점수 차는 무려 20.42점이었다. 20점이 넘는 점수 차를 인정한 코스트너는 "그녀는 클래스가 다르다"며 김연아의 압도적인 기량을 인정했다.
또한 코스트너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챔피언 애쉴리 와그너(22)도 "김연아는 보는 이들이 빠져들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며 김연아를 칭찬했다. 이번 대회에서 여자 싱글 10위권 진입에 성공한 리지준(17, 중국)과 그레이시 골드(18, 미국)같은 기대주들은 김연아를 존경하는 스케이터로 꼽았다.
이번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미모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키이라 코르피(25, 핀란드)와 알리사 시즈니(25, 미국)도 '스케이터 김연아'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조애니 로셰트(27, 캐나다)는 지난 2010년에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연아는 대단한 스케이터다. 나는 개인적으로 올림픽 결과에 만족한다"며 금메달리스트로서의 김연아를 인정했다.
나브라틸로바가 그랬듯이 자신보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인정할 때 선수가 지니는 품격은 더욱 살아난다. 최고의 선수들은 자신의 강한 자존심을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으면서 상대를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는 선수들도 있다. 주니어 시절부터 김연아와 함께 경기를 펼친 아사다 마오는 김연아에 대한 멘트를 자제하고 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는 23.06점 차로 아사다를 제쳤다. 당시 아사다는 김연아에 대한 멘트는 하지 않고 "나의 실수가 너무 분하다.그러나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는 말을 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김연아처럼 아사다도 일본 국민들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아사다도 쉽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선수에 따라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경우도 있지만 끝까지 지키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 나은 지는 개인의 결정이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코스트너와 와그너는 상대의 압도적인 실력을 인정하면서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 = 캐롤리나 코스트너, 조애니 로셰트 ⓒ 엑스포츠뉴스DB, 애쉴리 와그너 ⓒ Gettyimages/멀티비츠]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