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삼성화재의 훈련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말 독하게 훈련을 시켜도 우리도 뭔가를 이루자는 의욕이 강했어요. 선수들의 개성도 너무나 강했죠. 하지만 이러한 점을 신치용 감독이 잘 파악해 이끌어주셨고 우리도 결국 따라갔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프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점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삼성화재만의 문화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1995년 창단 삼성화재는 97년부터 지금까지 한국남자배구의 정상권을 수성하고 있다. 1997년 처음으로 겨울 시즌에 참가한 삼성화재는 곧바로 정상에 등극했다. 그리고 이후 9연패(슈퍼리그 8연패 프로 원년 우승)의 신화를 세웠고 겨울리그 77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삼성화재는 한국배구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여전히 왕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올 시즌도 현재(17일 기준) 9승1패를 기록하며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출범 시절 삼성화재는 창단 팀의 어려움을 피하지 못했다. 리그를 소화할 선수가 부족해 겨울시즌 출전이 좌절됐다.
삼성화재의 창단 멤버인 김상우(39) MBC 스포츠플러스 배구 해설위원은 "새로운 구단이 창단되면서 성균관대와 한양대 그리고 홍익대 등 3개 대학에서 선수들을 뽑았다. 창단 멤버는 10명이었다. 하지만 김세진과 나는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일부 선수들은 즉시 전력 투입이 어려웠고 7~8명의 인원으로는 도저히 리그 참여가 힘들어 1995~1996년 시즌은 출전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세진(38)과 김상우는 대학 경기는 물론 국제대회 출전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삼성화재의 항해 시기는 1년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96년 10월에 열린 실업배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예고했다.
삼성화재의 전성기를 이끈 트리오 왼쪽부터 김세진, 김상우, 신진식 (C) 삼성화재 제공
"당시에는 (김)세진이와 나 그리고 창단 멤버들 밖에 없었어요. (신)진식이와 (방)지섭이 등이 가세하기 전이었죠. 당시 진식이가 없었지만 고려증권을 꺾었고 결승전에서 대한항공을 만났어요. 1,2세트를 잃으면서 패색이 짙어졌는데 남은 3세트를 모조리 따내며 우승을 차지했죠. 그 때 우승이 삼성화재의 시초가 됐습니다."
96~97 시즌을 앞두고 또 한 명의 최대어인 신진식(37)이 가세했다. '좌진식 우세진'이라는 유명한 명칭은 이 때 성립됐다. 장신 세터 방지섭은 새롭게 부임한 신영철(현 대한항공 감독) 코치의 조련을 받게 된다.
첫 출전한 겨울 시즌 개막전에서 삼성화재는 현대자동차서비스를 만났다. 임도헌(40) 진창욱(40) 강성형(42)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버티고 있었던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우승후보 1순위 팀이었다. 삼성화재의 젊은 패기는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상대로 분전했지만 개막전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현대를 잡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출전한 겨울 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삼성화재의 9연패 신화는 계속 진행된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계신 팀들을 상대로 젊은 선수들이 선전을 펼쳤죠. 이러한 점에 관중들은 열광했고 정말 인기가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저희들 때문에 소외된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를 했죠."
'희생과 헌신'으로 요약되는 삼성화재는 문화는 초창기 때 기틀을 잡았다. 신치용 감독은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같이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파악해 팀에 융화시켰다. 선수들도 혹독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며 팀을 위해 희생했다.
"우선 같은 학교 출신끼리 팀에 모이면 파벌이 생기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 삼성화재라는 팀으로 뭉치도록 최선을 다했죠. 훈련이 정말 독하고 힘들었는데 선수들도 무엇인가를 이루자는 열의가 너무 강했어요. 이러한 점이 잘 맞아 최상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팀 문화가 생기다보니 후배들도 팀에 들어와 알아서 따라왔습니다."
[사진 = 김상우, 삼성화재 (C) 엑스포츠뉴스DB]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