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현기 기자) 손흥민은 살아있었다. 골과 도움은 없었지만 그라운드 곳곳에서 번뜩이는 패스를 뿌리며 프리미어리그 전통의 강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위협했다.
일각에서 제기한 손흥민 '쇠락론'도 사실이 아님을 90분 내내 증명했다. 해리 케인이 빠진 '뉴 토트넘'이 절망이 아닌 희망임을 손흥민이 입증했다. 환상적인 활약이었다.
손흥민이 왼팔뚝에 캡틴 완장을 차고 풀타임을 소화한 가운데 소속팀 토트넘은 2년 10개월, 6번째 맞대결 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완파하고 시즌 첫 승을 챙겼다.
그는 날카로운 슈팅보다는 찬스 만들어주는 것에 전념하며 토트넘 공격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후반 중반 이후엔 전방 원톱으로 뛰며 '손흥민 시프트' 가능성을 알렸다.
손흥민은 20일 영국 런던 토트넘 홋스퍼 경기장에서 끝난 2023/24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 맨유전 왼쪽 공격수로 선발 출격, 전후반 추가시간까지 합치면 103분을 뛰었다. 토트넘은 이날 후반 4분 미드필더 파페 사르의 선제골, 후반 38분 상대 수비수 리산드로 마르티네스의 자책골을 묶어 맨유를 2-0으로 누르는 기염을 토하고 지난 13일 브렌트퍼드 개막전 원정 경기 2-2 무승부에 이어 1승1무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 중간 순위 5위를 달렸다.
화려한 골과 도움으로 6만 홈 관중을 환호하게 만드는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번뜩이는 감각과 헌신이 손흥민의 발 끝에서 나왔다.
토트넘을 이끄는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해리 케인이 떠난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이날 브라질 국가대표 히샤를리송을 뽑았으며, 오른쪽 날개에 데얀 쿨루세브스키를 낙점했다. 지난 13일 브렌트퍼드와의 개막전 원정 경기에 이어 두 경기 연속 손흥민-히샤를리송-쿨루세브스키 공격 라인을 가동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미드필더로는 사르와 이브 비수마, 제임스 매디슨을 투입했다. 백4는 왼쪽부터 데스티니 우도지를 비롯해 크리스티안 로메로, 미키 판더펜, 페드로 포로로 짜여졌다. 올 여름 영입된 이탈리아 국가대표 굴리에모 비카리오가 골문 앞에 섰다.
사실 일부 영국 언론에선 브랜트퍼드전이 끝난 뒤 난데 없는 손흥민 위기론을 꺼내들고 나왔다. 앞서 브렌트퍼드전에서 손흥민이 토트넘 141년 사상 처음으로 비유럽 출신 정규 주장이 되는 영광을 안고 개막전에 나섰으나 전반 중반 상대 역습을 저지하려다가 페널티지역에서 상대 선수를 넘어트려 페널티킥을 내주고 실점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공격에서도 슈팅 2개에 그치는 등 왼쪽 측면에 치우쳐 손흥민 특유의 활발한 몸놀림과 골결정력이 살아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후반 29분 이반 페리시치와 교체아웃되면서 개막전을 마쳤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미드필더인 제임스 매디슨이 부주장으로 뽑힌 만큼 손흥민에 벤치로 들어가면 매디슨이 주장 완장 차면 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하지만 손흥민은 맨유전에서 이런 분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스스로 증명했다.
토트넘은 지난해 10월19일 열린 2022/23시즌 첫 맞대결 원정 경기에서 0-2로 지더니 지난 4월27일 홈 경기에선 2-2로 비겼다. 2021/22시즌엔 맨유에 2전 전패했으며,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21시즌엔 2020년 10월4일 원정 경기에서 6-1로 대승했으나 2021년 4월11일 홈 경기에성 1-3으로 졌다.
결국 토트넘은 이날 경기 전까지 최근 5차례 맨유전에서 1무4패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승리했던 가장 최근 경기가 코로나19로 관중 없이 뛰던 2년 10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만큼 토트넘이나 새 사령탑인 포스테코글루 감독에게 승리가 절실했는데 손흥민이 쾌승의 특급 도우미가 된 것이다.
손흥민은 이날 전반 40초 쿨루세브스키의 오른쪽 측면 터치라인 부근 긴 크로스를 반대편에서 오른발 발리슛이 시도했으나 잘못 맞아 크게 빗나가면서 첫 터치가 그렇게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이후부턴 짧고 간결하면서 상대 빈 틈을 송곳처럼 찔러주는 '키패스'로 컨디션을 점점 끌어올렸다.
토트넘은 전반 5분 상대 알레한드로 가르나초의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오른발 대각선 슛, 전반 12분 마커스 래시퍼드의 골지역 오른쪽 위협적인 슛을 골키퍼 굴리에모가 연달아 걷어낸 뒤 반격을 강화했다.
그리고 조용하던 손흥민이 등장했다. 손흥민은 전반 24분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질주, 페널티지역 반대편 쿨루세브스키에게 공을 연결햏ㅆ다. 쿨루세브스키가 오른발 슛을 날렸으나 오나나가 잡아내 무위에 그쳤다.
몸을 푼 손흥민은 점점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토트넘 공격 활로를 뚫었다. 전반 30분엔 왼쪽 미드필드에서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허를 찌르는 패스를 넣었으나 사르가 이를 제대로 슈팅하지 못해 무위에 그쳤다.
이어 전반 40분엔 이날 경기 전반전 양 팀 공격 중 가장 골과 가까운 장면에 관여했다. 손흥민이 아크 왼쪽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헤집고 들어가 옆으로 패스한 것을 포로가 오른발 강슛으로 연결했는데 크로스바를 강타한 것이다. 이어 사르의 슛이 맨유 선수 맞고 또 오른쪽 골포스트 맞는 불운도 겪었다.
자신감을 얻은 토트넘은 이후에도 줄기차게 손흥민과 매디슨을 중심으로 전반 추가시간은 물론 후반 초반에도 쉬지 않고 원정팀 골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골이 터졌다.
토트넘은 후반 4분 쿨루세브스키가 페널티지역 오른쪽 구석을 파고든 뒤 반대편으로 크로스한 것이 맨유 센터백 마르티네스 맞고 옆으로 흐르자 사르가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해 골망을 출렁였다. 2002년생으로 지난 시즌 프랑스 메츠에서 토트넘으로 이적한 사르는 이날 맨유전을 통해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터트리는 기염을 토했다.
한 골에 만족하지 않았다. 토트넘은 손흥민이 후반 7분 허를 찌르를 침투패스로 우도지의 슛을 도왔으나 오나나 선방에 막혀 2골 차로 달아날 기회를 놓쳤다.
이후 분주하게 움직이던 토트넘은 후반 25분 선수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바꿨다. 그런데 이날은 페리시치 교체 대상으로 손흥민이 아닌 히샤를리송이 선택돼 눈길을 끌었다. 터치라인에 페리시치와 벤 데이비스가 섰는데 페리시치의 교체 대상은 히샤를리송이었고, 흥민은 포지션을 왼쪽 날개에서 최전방 공격수, 바로 케인이 맡던 곳으로 바꿨다.
그 만큼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손흥민의 이날 활약을 믿고 다양하게 활용했다는 뜻이다.
이는 추가골이라는 용병술 적중으로 완성됐다.
후반 38분 페리시치의 왼쪽 측면 낮은 크로스를 전방으로 달려들던 데이비스가 왼발을 스치듯이 슛을 했는데 볼이 가는 경로에 있던 마르티네스를 맞고 볼이 골망을 출렁인 것이다. 골 직후만 해도 프리미어리그 홈페이지에선 데이비스의 골, 페리시치의 어시스트로 기록됐으나 이후 마르티네스의 자책골로 정정됐다. 이 골의 출발점은 아크 정면에서 볼을 받자마자 뒤에서 달려드는 선수에게 빠르게 볼을 내줘 왼쪽 측면 공격을 전개하도록 유도한 손흥민이었다.
2-0이 되면서 토트넘 홋스퍼 홈구장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턴하흐 감독은 래시퍼드를 불러들이는 등 사실상 수건을 던졌다. 이후 맨유의 만회골을 위한 공격은 비카리오의 귀신 같은 선방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토트넘이 2-0 완승으로 90분 격전을 마무리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턴하흐 감독과 악수를 한 뒤 담담하게 그라운드로 걸어들어갔다.
토트넘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승리를 만끽했다. 풀타임 뛴 손흥민 역시 동료들과 기쁨을 나눴다.
이날 승리로 토트넘은 케인 이탈에 따른 우려를 말끔히 씻고, 상위권 경쟁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는 팀임을 알렸다. 그 중심에 손흥민이 있었다.
경기 직후 평점에서도 토트넘의 완승이 확실히 드러났다. 토트넘은 점유율에서 56%로 44%인 맨유를 앞선 것은 물론, 패스도 501회나 시도했고 성공률이 85%였다. 슈팅도 17번에 유효슈팅이 6개나 됐고 골대도 두번이나 맞췄다.
당연히 토트넘 선수들의 평가도 좋았다. 선제골 주인공 사르가 7.89점으로 팀내 최다 평점을 기록했고, 귀신 같은 선방 행진을 펼친 비카리오(7.75점), 손흥민(7.70점), 비수마(7.66점), 포로(7.35점), 메디슨(7.24점)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최전방에 포진했으나 존재감 없이 교체아웃된 히샬리송이 6.23점으로 가장 낮았다.
손흥민은 경기 후 BBC와의 인터뷰에서 "매우 특별하다. 맨유를 상대로 첫 홈 승리를 따내 기쁘다. 시작부터 끝까지 팬들은 선수들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거의 100분 가까이 그랬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오늘 경기는 내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성장하는 것이고, 포인트를 따는 것"이라며 "시작은 조금 불안했지만 놀라지 않았다. 선발 라인업에 20세 선수가 2명이었고, 22세 선수도 2명이었다. 우리의 경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고, 후반 들어 우리 플레이를 했다"고 선수들을 극찬했다. 이어 "젊은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았고 손흥민이나 매디슨 같은 경험 있는 선수들의 플레이도 훌륭했다"며 손흥민이 이날 승리의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음을 알렸다.
토트넘은 오는 26일 오후 8시30분 본머스와 3라운드 원정 경기를 벌인다. 이어 9월2일 오후 11시 번리와 역시 원정 경기를 치르며 이후 A매치 브레이크를 갖고 9월16일 오후 11시 승격팀 세필드 유나이티드를 홈으로 초대한다. 캡틴 손흥민이 기세를 탔고 토트넘의 초반 질주도 좋다. 프리미어리그의 새로운 변수가 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현기 기자 spitfir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