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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황제, 월드컵에 출현하다!

기사입력 2006.02.13 06:55 / 기사수정 2006.02.13 06:55

손병하 기자
이전 5번의 대회까지 수많은 화제와 이변 그리고 스타를 낳았던 월드컵이란 세계 최고의 스포츠 축제는 이제 유아기를 지나, 막 소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인종과 종교 가치관이 다른 세계의 수많은 나라를 축구란 단일 종목으로 통일시켜가고 있었고, 월드컵이란 대회의 규칙과 기본 틀들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어려움 속에 치른 지난 5번의 대회에서 보여준 월드컵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올림픽 이상의 관중동원 능력을 보였으며, 막대한 경제효과와 국가 이미지 상승까지 월드컵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였다. FIFA는 이런 축구라는 단일 종목의 성장에 스스로 대견해 했으며 U.N(국제 연합),I.O.C(국제올림픽위원회) 등의 세계 통합기구와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비로소 월드컵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 제6회 1958년 스웨덴 월드컵

▲개최 배경

▲ 스웨덴 월드컵 포스터
ⓒfifaworldcup.com
지난 1946년 총회에서 50년 브라질 대회와 54년 스위스 대회를 의결했던 FIFA는 58년에 열려야 할 6회 대회의 개최국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던 세계 2차 대전의 후유증과 이에 맞물렸던 세계 대공황의 충격파 때문이었다. 1946년 총회에서 일찌감치 두 개 대회의 개최국을 찾은 FIFA가 이후 개최국 선정에 늑장을 부리다 일어난 결과였다.

전쟁의 주 무대였던 유럽의 힘겨움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다소 비켜 있던 남미마저 경제 한파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할 정도로 빈곤에 허덕이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이 불안한 경제 상황 속에 흔들리면서 대부분의 남미 국가도 직격탄을 맞은 듯 어려웠던 시기였다. 개최권 분할이란 암묵적인 명분에 따라 6회 대회는 남미에서 개최해야 했지만, 힘든 자국 상황 때문에 남미는 그 어느 나라도 유치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미에도 유치 희망국이 없자 FIFA의 눈은 자연스럽게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유럽의 어느 나라도 월드컵을 개최할 만한 여건을 갖춘 나라는 찾기 힘들었다. 이렇듯 개최국 선정을 놓고 또 한 번 위기에 빠졌던 FIFA는 당시 스위스와 더불어 중립국인 스웨덴에 월드컵을 개최할 것을 권유했다. 개최권 분할이란 명분에도 어긋나고 개최를 희망하며 나서지 않았던 국가에 FIFA가 권유하는 초라한 형식이었지만, FIFA는 그런 것들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FIFA의 어려운 권유를 스웨덴이 받아들이면서 힘겹게 6회 월드컵 개최지를 선정할 수 있었지만, 그동안 유럽과 남미 양대륙에서 번갈아 열리는 대회가 유럽에 편중되는 현상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었고 남미대륙에서는 두 차례밖에 열리지 않아 FIFA로서는 이런 결정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비록, 월드컵 개최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막상 유럽이 또다시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다면 불어닥칠 남미의 거센 반발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립국 스웨덴에서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남미 국가는 없었다. 오히려 개최권 분할이란 명분 뒤에 숨어있는 부담스러운 짐을 벗어 던진 듯 남미의 국가들도 환영의 뜻을 나타냈었다. 그만큼 당시 세계는 경제적으로 힘들었었다.

▲ 본선 경기 장면
ⓒ fifaworldcup.com

▲월드컵 뒷얘기

-'축구 황제', 세상 밖으로 나오다.

스웨덴 월드컵 4그룹에 속해 있던 브라질은 소련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 라는 아주 긴 이름을 가진 17세 소년을 출전시키게 된다. 오스트리아를 3-0으로 완파했지만, 잉글랜드와의 2차전을 0-0으로 비긴 브라질은 결선 토너먼트에 오르기 위해 소련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당시 자갈로 디디 가린차 등 뛰어난 공격수들을 보유했던 브라질의 페욜라 감독은 공격력의 증대를 위해 17세의 어린 소년을 출장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7세 소년을 출장시키자 많은 사람은 '브라질에 그렇게 선수가 없나?'라며 우려를 표시했었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어린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의 놀라운 드리블과 슈팅력, 볼 컨트롤 능력 등에 매료되었다. 이 소년이 바로 축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로 칭송받는 펠레였다.

소련과의 경기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마치 펠레는 이후, 웨일스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와의 4강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포함해 2골을 몰아치며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전 세계를 사로잡아버린 축구 황제의 탄생이었다.

-최고의 창 vs 최고의 방패

1958년 6월 15일, 브라질과 스웨덴의 4조 예선 마지막 경기. 펠레의 등장으로 열광한 세계 축구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인 대결이 펼쳐졌었다. 바로 가장 예리한 창으로 평가받는 펠레와 가장 튼튼한 방패로 추앙받고 있는 야신의 첫 번째 대결이었다.

신성처럼 등장한 펠레와 1956년 올림픽에서 조국 소련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레프 야신의 역사적인 대결은 브라질의 2-0 승리로 끝났지만, 두 선수 간의 대결에서는 펠레의 무수한 공격을 야신이 선방해 내면서 무승부로 끝났었다. 세계 축구사에 가장 뛰어난 공격수와 골키퍼가 처음 맞대결을 펼쳤던 1958년 6월 15일의 역사적인 경기는, 아직도 많은 축구팬의 입에서 화자 되고 있다.

-영국만 4개 팀이 출전?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영국의 4개 축구협회가 모두 참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각각 유럽 예선 1조와 8, 9조에서 1위를 차지해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고, 웨일스는 4조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이스라엘과 플레이오프를 벌여 승리해 마지막으로 본선에 합류하게 되었다.

웨일스의 경우 본선 진출에 엄청난 행운이 곁들여졌었다. 원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복잡한 지역 예선의 최종 승자인 이스라엘이 본선에 진출했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상대팀들의 포기 등으로 단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본선 티켓을 따게 되었다. 하지만, FIFA가 본선 진출국은 단 한 경기라도 예선을 치러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웠고, 결국 추첨을 통해 유럽 탈락국 중 하나인 웨일스와의 대결을 성사시켰다.

웨일스는 이스라엘과의 플레이오프 두 경기를 모두 2-0 승리로 장식하며 행운의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고, 웨일스의 막판 합류로, 영국에 존재하는 4개의 축구협회 모두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참가하는 진기록을 만들게 되었었다.

◆대회 기록

*대회기간 : 1958.6.8 - 1958.6.29(22일간)
*참 가 국 :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 잉글랜드, 프랑스, 헝가리, 멕시코, 북아일랜드, 파라과이, 스코틀랜드, 스웨덴, 웨일즈, 소련, 서독, 유고슬라비아(16개국)
*개최도시 : 스톡홀름, 보라스등 12개 도시
*총 득 점 : 126골, 평균 득점 3.6골
*총 관 중 : 868,000명, 평균 관중 24,800명
*득 점 왕 : 퐁텐느(13골·프랑스)
*결 승 전 : 브라질 vs 스웨덴(5 : 2, 브라질 우승)
지금까지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로 칭송받고 있는 펠레의 데뷔전이 펼쳐졌던 스웨덴 월드컵은 펠레 외에도 드리블의 교과서인 브라질의 가린차, 그라운드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프랑스를 지휘했던 레이몽 코파, 그리고 '철의 문' '신의 손'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말해주는 소련의 수문장 레프 야신 등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불세출의 축구 영웅들이 대거 등장했던 대회이기도 했다.

또, 스웨덴 월드컵은 비록 경제적인 위기와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로 인해 증가세를 보였던 관중이 소폭 하락하고 이전 대회들에 비해 관심을 덜 받은 대회였지만, 월드컵의 실질적인 내면을 살찌우게 하는 소중한 대회였다.

손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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