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브라질이 낳은 축구 황제 호나우두가 은퇴를 선언했다.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 기록 수립 및 전 세계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았다.
빈민가 소년에서 브라질 대표팀까지
우리 속담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미천한 집안이나 변변하지 못한 부모에게서 훌륭한 인물이 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처지를 딛고 일어서 성공한 이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부의 대물림 심화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병폐 현상으로 말미암아 의미가 없어졌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세계적 선수 호나우두의 일대기를 보면 이 말과 너무나 들어맞는다.
호나우두는 1976년 9월 22일 브라질의 히우 지 자네이루 빈민가 벤투 히베이루에서 태어났다. 히우 지 자네이루는 브라질 축구의 보물 창고다. 소위 내로라하는 선수들은 이 지역 출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로 말미암아 빈민가에서 자란 이 지역 출신 선수들은 가난이라는 역경을 딛기 위해 축구라는 수단을 이용한 사례가 많다. 호나우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과 성공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더라도 호나우두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공을 차는 것을 더 즐겼다. 이후 그는 우연한 기회로 고향팀 플라멩구 입단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은 그에게 교통비조차 쥐여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입단 테스트를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의 바람을 이루지 못한 호나우두였지만, 그의 재능은 여전했다.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낸 그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 히벨리누 등과 함께 조국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자이르지뉴의 눈에 포착됐다. 1970년대 자국 최고의 선수였던 자이르지뉴는 어린 호나우두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선수 생활에 물꼬를 터 준 결정적 인물로 유명하다.
1986년 테니스 클럽 바우케이레라는 유소년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어린 호나우두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1993년에 브라질 명문 클럽 크루제이루와 정식 계약을 맺게 됐다. 그는 16살이란 어린 나이에도, 브라질레이랑과 주 리그에서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며 월드컵 우승에 목 마른 브라질 축구의 보석으로 떠오른다. 자연스레 펠레의 전유물이었던 황제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호나우두의 재능을 높이 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은 겁 없는 10대 소년을 1994 미국 월드컵에 데려갔다. 본선에서는 베베투와 호마리우라는 투톱의 그늘에 밀려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지만, 삼바 군단의 두터운 선수층을 고려할 때 호나우두의 승선은 파격적이었다.
한편 파헤이라호는 이탈리아를 꺾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자연스레 대회 최고의 선수는 호마리우의 몫이었다. 애초 브라질은 실리 축구를 지향하며 대회 내내 실용성을 강조했다. 두터운 중원을 바탕으로 상대와의 허리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 것. 하지만 이는 브라질 축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대회 당시 브라질의 득점 루트는 호마리우의 개인 능력이었다. 이에 파헤이라는 24년 만에 월드컵 제패라는 성과를 얻었음에도, 질타를 받았다.
유럽으로 떠난 호나우두 그리고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
크루제이루에서의 활약을 토대로 호나우두는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선배 호마리우가 활약했던 PSV 에인트호번이었다. 그는 2시즌 동안 46경기에 나서 42득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무릎 부상이라는 치명적 악재가 있었지만, 그의 득점포는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내로라하는 클럽들이 호나우두에 군침을 흘린 사이, 그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명문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로 둥지를 옮겼다.
바르사에 입단한 호나우두는 전술 그 자체였다. 37경기에서 34골을 기록한 득점력도 우수하지만, 매 경기 모든 수비수의 넋을 빼는 드리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낳았다. 당시 호나우두를 막기 위해서는 파울밖에 없다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바르사에서 호나우두를 지도한 故 바비 롭슨 감독은 "당신은 아마 호나우두와 같은 선수를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슛을 하고 패스를 하는 부문에서 감각적이다. 남들보다 거리가 뒤처져도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볼을 낚아채 상대 수비진을 트린다. 개인 능력과 함께 팀플레이에도 유용한 매우 현명한 선수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호나우두의 바르사 생활은 길지 않았다. 바르사와의 재계약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진 것. 결국 호나우두는 짧은 스페인 생활을 마치고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탈리아 무대 입성 후에도 그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리그 적응에 애를 먹을 것이라는 우려마저 잠재운 것.
입단 첫 시즌 인테르의 UEFA컵 우승과 리그 준우승을 이끈 호나우두는 1년 만에 리그 최우수 선수와 UEFA MVP라는 개인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됐다. 이미 바르사 소속으로 1996년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던 그는 1997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동시에 석권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호나우두의 활약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 4년 전 벤치 멤버에 불과했던 10대 소년은 어느덧 대표팀 중추로 성장했다. 호나우두의 브라질은 1997년 컨페더레이션스컵과 코파 아메리카를 동시에 석권했고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우승후보 0순위로 군림하게 됐다. 당대 내로라하는 선수였던 데니스 베르흐캄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지네딘 지단도 호나우두와 비교하면 한 수 아래라는 평이 많았다.
황제라는 칭호가 너무 부담되었을까? 호나우두는 프랑스 월드컵을 기점으로 나락의 길에 빠지게 됐다. 애초 호나우두는 월드컵 출전 당시 가벼운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나이키의 상업적인 목적이 낳은 희생양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호나우두라는 선수에 쏠린 전 세계 축구계의 시선은 그의 무리한 출장을 이끌었다. 대회 내내 아픈 몸을 이끌고도 MVP를 차지한 점은 호나우두의 천부적인 능력을 대변했다.
한편 1998년 브라질 대표팀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화려한 선수 진은 대회 우승 후보 0순위라는 점을 대변했지만, 대회 당시에는 호마리우와 주니뉴 파울리스타가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난 94 미국 월드컵에서 수비 중심의 경기 운영 때문에 우승하고도 비난을 받은 브라질의 상황상, 월드컵 내내 브라질은 균형보다는 공격에 치중해야 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대회 신데렐라로 부상한 히바우두와 부상이란 적과 맞선 호나우두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결승에서 홈팀 프랑스에 0-3으로 패. 이후 때아닌 나락의 길을 걷게 됐다. 설상가상 결승 직전 호나우두가 숙소에서 발작을 일으킨 점이 드러나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무릎 부상의 악재 그리고 2002 월드컵을 통한 재기
월드컵 후 호나우두에 쏠린 시선은 지단으로 옮겨졌다. 이미 유벤투스에서 호나우두의 인테르를 제치고 리그 우승에 성공했던 지단은 아트 사커의 선봉장으로서 유로 2000 우승에 성공. 세계 최고의 선수로 부상했다. 더욱이 지단은 유벤투스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당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월드컵을 마친 호나우두는 마음을 가다듬고 1999 코파 아메리카에 출장했다. 그는 영혼의 동반자 히바우두와 함께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며 황제의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던 무릎 부상이 재발한 것. 지속한 부상은 그를 2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라운드와 작별하게 했다. 또한, 지단 이외에도 히바우두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어느덧 호나우두는 잊힌 존재가 됐다.
그리고 2001년 12월 기적이 일어났다. 리그 우승에 목마른 인테르의 수호신으로 호나우두가 복귀한 것. 그는 선발보다는 교체로 나와 컨디션 점검에 나서더니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는 멀티 골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알렸고, 2001/02시즌 후반기에는 풀타임을 소화하며 경기 감각을 완전히 회복했다.
호나우두의 재기는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스쿠데토와는 유독 인연이 없던 인테르에 희망이 됐다. 그러나 리그 우승을 목전에 둔 인테르는 라치오와의 최종전에서 2-4로 패했다. 33라운드까지 유벤투스와 AS 로마를 제치고 리그 선두를 달렸던 인테르는 이날 패배로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경기 휘슬이 울린 순간 호나우두는 쉴 새 없이 울었다. 동료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그에게 다가가 위로했지만, 호나우두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인테르 팬들 역시 그와 슬픔을 공유했다.
리그 우승 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호나우두는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에 출전했다. 대회 직전 호나우두는 는 '매 경기 골을 넣겠다'라는 다짐을 하며 이인자로 전락한 조국 브라질 축구의 부흥을 이끌 것을 약속했다. 당시 브라질은 남미 예선에서 3위로 통과했으며 계속되는 선수 테스트와 감독 교체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2001년 7월 우루과이 원정 경기를 통해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안정적인 팀을 만들 것으로 보였다. 이마저도 온두라스와의 2001 코파 아메리카 8강에서 패하는 굴욕으로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삼바 축구 사상 최악의 침체기로 불렸다. 줄곧 1위를 지켰던 FIFA 랭킹도 3위까지 떨어졌으며 우승 후보를 논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에 밀렸다.
본선 시작과 함께 호나우두의 브라질은 다른 팀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다른 우승후보와 비교해 2% 부족했던 브라질은 신예 스타 호나우지뉴를 기점으로 히바우두 그리고 돌아온 호나우두가 3R을 형성. 막강한 공격력으로 대회 내내 승승장구했다. 여기에 풀백이 아닌 윙백으로 대회에 나선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마르쿠스 카푸가 측면에서 맹활약했다. 클레베르송(혹은 주니뉴)와 지우베르투 시우바가 지킨 중원은 단단했으며 3백 역시 난공불락의 수비진을 형성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눈부신 선수는 호나우두였다. 그는 4년 전과 비교해 날렵함은 줄었지만, 독일과의 결승전 2골을 포함해 대회 합계 8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하며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다. 탁월한 위치 선정은 물론 동료와의 연계 플레이도 돋보였다. 무엇보다 의지력이 엿보였다. 공격 1선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에 빠뜨렸고 이를 통해 2선에서 침투하던 동료에게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갈락티코 합류 그리고 월드컵 최다 득점
월드컵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호나우두는 인테르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이하 레알)에 입단했다. 당시 레알은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갈락티코 정책으로 수준급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자연스레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레알이라는 클럽에 입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2/03시즌 레알은 지단과 루이스 피구를 보유한 상태였다. 여기에 호나우두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더해졌으니 이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호나우두는 이적 첫 시즌만의 무난히 적응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2002/03시즌 리그 우승에 이바지했다.
순탄할 것 같던 호나우두의 레알 생활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갈락티코 1기 역시 빛 좋은 개살구라는 악평 속에 막을 내렸다. 설상가상 호나우두는 리그 경기 도중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의 콜롬비아 수비수 루이스 페레아의 비신사적인 태클 때문에 부상의 늪에 다시금 빠졌다.
이후 호나우두는 레알에서 하락세를 타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6 독일 월드컵 출사표를 던졌다. 몸도 컨디션도 모든 게 엉망이었다. 체중 문제는 둘째치고 경기력 자체에 의심이 들었다. 이는 첫 경기 크로아티아전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당시 호나우두는 문전에서 기웃거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 하나 없이 침묵했다.
일본전 멀티 골과 가나전 선제 득점(대회 총 3골)으로 월드컵 통산 15골이라는 대기록은 세웠지만, 브라질은 8강 탈락이라는 굴욕적인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은 선수 개인은 완벽했지만, 공수 균형에서는 최악이었다. 1994년 수비 위주의 경기 운영으로 브라질의 4번째 월드컵 우승에 이바지한 페헤이라 감독은 4-2-2-2라는 극단적인 공격 전술로 상대와 맞섰으며 ‘한 골을 먹어도 두 골을 넣어도 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대회에 나섰다가 졸전 끝에 탈락했다.
유럽 무대를 떠나 조국으로 그리고 은퇴
월드컵을 마친 호나우두는 레알로 복귀했지만, 파비우 카펠로 감독과의 마찰로 AC 밀란으로 둥지를 옮기게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나우두는 2006/07시즌 후반기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중위권으로 밀린 밀란을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또한,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AC 밀란의 통산 7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타이틀 획득에 숨은 공헌자가 되었다.
밀라노에서 제2의 축구 인생을 보낸 호나우두였지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선수 생활 내내 괴롭혔던 무릎 부상이 재발한 것. 양쪽 무릎을 모두 잃은 호나우두는 브라질로 돌아가 재활해 매진했지만, 잇따른 스캔들에 홍역을 치르며 밀란과 계약을 해지하게 됐다. 호나우두를 통해 재미를 봤던 AC 밀란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도 부상과 스캔들이라는 악재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밀란과 계약을 해지하고 나서 호나우두는 은퇴가 유력했다. 그러나 고향팀 플라멩구가 구애의 손길을 뻗었다. 호나우두의 재활을 위해 누구보다 매진했던 플라멩구였지만, 그의 선택은 상파울루의 코린티안스였다. 막대한 자금력을 토대로 브라질리그 제패를 노린 코린티안스는 관중 유치와 팀 성적을 위해 호나우두를 전격 영입했다.
유럽 생활을 마친 호나우두는 거구의 몸에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몸소 입증하며 코린티안스의 부흥을 이끌었다. 입단 첫 시즌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코파 두 브라질 2연패를 달성했고 이를 통해 코린티안스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에 성공했다. 아쉽게도 16강 탈락으로 그의 남미 제패는 무산됐지만, 잦은 부상과 활동량 저하라는 단점을 극복하며 자신의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다수 축구 팬은 호나우두를 일컬어 '신의 능력을 소화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지만, 무릎이 성하지 않았다. 선수 생활 내내 상대 수비진의 밀착 마크를 당해야 했고, 자신의 몸 또한 받쳐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호나우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근성을 보여줬다. 양쪽 무릎의 슬개건이 나가고 오랜 기간의 부상으로 경기 감각이 저하됐어도 당당하게 이겨냈다.
부상 이후에는 여러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전 세계 팬들에 알렸다. 이번 기자회견을 끝으로 호나우두는 그라운드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섰다. 전성기 시절 그가 보여준 날렵함과 상대를 쉽게 속이는 드리블 그리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득점포는 사라졌지만, 그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호나우두야말로 축구 황제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2002 월드컵 결승 당시 호나우두 ⓒ 글로부 에스포르테 홈페이지]
박문수 기자 SPORTS@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