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7.03.23 11:04 / 기사수정 2007.03.23 11:04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1992년, 그 해에는 두 명의 투수가 가공할 만한 위력의 '돌직구'로 이름을 날렸다. 한 명은 첫 해 13승 무패로 승률1위를 차지한 '돌하루방' 삼성 오봉옥(38)이었고 또 한 명은 한국시리즈 MVP로 꼽혔던 롯데의 '슈퍼베이비' 박동희였다.
지난 22일 '슈퍼베이비' 박동희가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향년 39세.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45)감독도 인정했던 그는 가지고 있던 실력에 비해 너무나 아쉬운 성적을 올려 그 이별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부산고 시절부터 그는 박노준(45)에 버금가는 고교야구 스타였다. 전국의 고등학교가 예선전 없이 출전하는 봉황대기에서 평균자책점 0(1985년)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고려대 시절에는 대표팀의 기둥 투수로 일본의 노모 히데오(39)와 라이벌 대결을 펼치기도 했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입단제의를 뿌리치고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에 계약금 1억 4천만원을 받고 입단하며 커다란 기대를 모았던 그는 90년 4월 11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10개의 탈삼진(당시 신인 최초 두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하며 '명불허전'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투수코치이던 '너구리' 장명부(2005년 작고)와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10승 7패 7세이브(평균자책점3.04)를 기록, 기대에 조금 못 미쳤다.
이광환(59)전 LG 감독이 '투수 분업제'를 제창하기 전까지 마무리 투수는 '선발투수로는 실력이 모자라서 밀려나는 투수'의 인상이 컸다. 전문 마무리로 기용하고자 했던 장 코치와 박동희와의 의견 충돌은 여기서 일어났고 그로 인해 첫 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 나왔다.
최동원(49)만큼은 아니었지만 박동희 또한 지나칠 만큼 많이 공을 던지며 승리를 쌓아갔다. 꿋꿋이 롯데 투수진을 지키며 이듬해 14승을 기록했고 92년에는 7승으로 자존심을 구기는 듯했지만 빙그레(한화의 전신)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경기 등판, 2승 1세이브를 올리며 팀에 우승깃발을 안겼다.
그러나 이후, 박동희는 최동원보다 더 빠르게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투구로 팔꿈치가 고장을 일으키며 점점 잊혀갔고 급기야 97년, 95' 신인왕 이동수(35)의 트레이드 상대로 삼성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최고 154km/h의 직구 외엔 별다른 주무기가 없던 박동희는 98년 외국인 투수 스캇 베이커에게 너클커브를 배우며 부활의 꿈을 키웠지만 아쉽게도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결국 2002년 쓸쓸히 은퇴하고 말았다.
은퇴하며 그는 '지도자로 돌아오겠다'라는 말로 제2의 야구인생을 쓰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그의 통산 성적(12년 59승 50패 58세이브 평균자책점 3.67)은 아마추어 시절 이름값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짧고도 강하게 자신의 공을 마음껏 뿌리며 부산 팬들의 기억에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만약 90년 당시가 아닌 현재에 등장했더라면?' 식의 가정도, '야구 꿈나무들의 선생님'이라는 꿈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 故 박동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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