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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박스] 'K-리그 응원녀'를 찾아서…대구FC '예그리나'

기사입력 2010.08.18 16:30 / 기사수정 2010.08.19 00:15

전성호 기자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이번 월드컵에도 어김없이 'XX 응원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온갖 이름을 달고 나온 '응원녀' 중 정작 평소에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관심이 있던 이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연예계 진출을 노리는 얄팍한 마케팅의 추구만이 엿보였다. 물론 본인들은 부정했지만.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월드컵이 끝나고 K-리그 경기장에서 발견됐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한번쯤은 '월드컵 때처럼' 직접 사진기자 대동해서 올릴법도 한 데 말이다.

그렇다면, K-리그 응원녀는 없는 걸까? K-리그 응원녀를 찾아 '미녀가 많다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서 만난 K-리그 응원녀들은 노출 심한 옷 대신 대구FC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어느 소속사에 속한 연예인 지망생도 아니었고,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카메라를 보고 예쁜 척을 하는 대신 땡볕과 폭우 속에서도 그라운드의 선수들을 향해 응원의 소리를 높일 줄 알았다. K-리그를 향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축구장을 찾는 이들. 바로 대구FC 서포터즈 클럽 '예그리나'였다.

'예그리나'란 '사랑하는 우리 사이'란 뜻의 순 우리말. '예그리나'가 보통의 K-리그 서포터즈 모임과 다른 점은 바로 오직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포항 스틸러스와 홈경기가 열렸던 15일 대구시민운동장 앞. 뜨거운 햇볕을 마다하고 '예그리나' 회원들은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기자는 '예그리나'의 모든 활동을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정은영(26, 사진 왼쪽)씨와 경기 시작 전 짧은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예그리나'에 대해 소개를 부탁한다

'예그리나'는 2008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각자 클럽이 있었지만, '여자가 축구를 본다'고 무시하거나 '여자는 골대 뒤에서 사라져라'라는 편견에 종종 부딪혔다.

당시 각 클럽에 여자가 한두 명씩밖에 없었는데, 우리끼리 모이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계기가 돼서 예그리나를 만들게 됐다. 예그리나가 생기면서 여성 서포터즈가 다 빠져나가 몇몇 클럽이 망하기도 했다. (웃음)

-'여성 서포터즈'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나 편견은 없나

여성 서포터즈를 선수가 좋아서 쫓아다니는 '오빠 부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팬이기 이전에 축구팬이란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대구FC 서포터즈 중에는 '도미네이터(Dominator)'가 가장 열정적인 응원을 하는 강성 클럽이다. 그들이 판을 만들어 놓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신나게 놀 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이다 보니 목소리가 하이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선수가 파울이나 부상을 당했을 때 같이 소리를 질러도 남자팬들과 달리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쟤는 저 선수 좋아하는 '빠순이'구먼…"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난다.

 

▲ '예그리나'의 홍보 전단지 

- '예그리나'만의 특징을 꼽는다면

사실 여자도 처음이 힘들 뿐이지, 한번 마음을 주면 남자보다 더 의리가 있다. 그런 면에서 '예그리나'는 의리로 뭉친 클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클럽 별도의 규칙이나 규율이 없다. 회장 제도도 당연히 없다. 회장 제도를 채택하면 회장이 바뀔 때마다 색깔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예그리나'에서는 사실상 리더 역할을 맡고 있지만, 회장이 아닌 '대장'이란 별칭으로 불릴 뿐이다. (웃음)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점점 회원 수가 늘고 있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회원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대구FC는 2003년 창단 후 매년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는데 실망스럽거나 응원의 마음이 꺾인 적은 없었나

내 자식이 공부 못 하고 꼴찌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구FC를 향한 마음도 같다. 물론 선수들이 패배의식에 젖어있거나, 열심히 뛰지 않는 게 느껴지면 가끔 실망스러울 때는 있다.

우리는 땡볕이 내리쬐든, 폭우가 쏟아지든(실제로 이날 경기 후반에는 기록적인 국지성 폭우가 내리기도 했다) 온 힘을 다해 응원하는데,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

여자들이라 그런지 감정이 풍부해서 이겨도, 져도 많이 운다. 얼마 전 대구가 성남에 3-1 역전승을 거뒀는 데 그때 모두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웃음)

-대구는 야구가 워낙 인기있는 도시고, 요즘 야구장에 여성팬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예그리나'가 축구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다. 우리는 야구보다 축구가 더 좋다.

그리고 대구에서 야구가 더 인기가 많긴 하지만, 처음 축구장에 데려오기가 힘들 뿐이지 한번 경기장에 발을 들이면 그 때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온다.

-아무래도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클럽이다 보니 많은 관심을 받을텐데

주목받는 것은 좋다.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보이더라.

경기장에서 보면 알겠지만 여자들이라고 조용조용히 응원을 하는 게 아니다. 함께 소리도 지르고, 응원가도 부르고, 북도 치면서 열정적으로 응원한다. 여자 목소리 자체가 하이톤이다보니 적은 숫자로도 압도적인 응원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대구 서포터즈 클럽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사실 대구 응원 분위기의 상당 부분은 아까 말했던 '도미네이터'가 조성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재밌게 노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도 주목은 우리가 더 받을 때 오빠들이나 남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구가 성적이 많이 안 좋다 보니 마음고생도 많겠다.

(웃으며 한숨) 성적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그래도 팀 성적에 함께 웃고 웃으면서 서로 정도 많이 쌓였고, 산전수전도 다 겪었다. 사실 대구 서포터즈는 K-리그 팬들 사이에서 '도인' 내지는 '대인배'로 불리지 않나. 해보시면 안다. (웃음)

-대구 팬으로서 대구FC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진정한 도깨비팀이 될 수 있다. 대구는 1위도, 꼴찌도 이길 수 있는 팀이다.

그런 면에서 매 경기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펼친다. 강팀이라면 당연히 이길 거란 기대감에 경기장에 왔다가 실망할 수 있지만, 대구는 이길지 질지 모르고 경기장에 오기 때문이다. (웃음)

사실 다른 팀 대부분은 대구를 약팀이라 무시할 것이다. 분위기나 조건, 환경 등이 선수들을 기죽게 할 뿐이지 결코 약한 팀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더 많이 온다면 경기장 분위기가 더 좋을 텐데…'라며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 '예그리나'와 이영진 대구 감독이 함께 (사진제공: 예그리나)

-'예그리나'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언제였나

지난해 FA컵 16강 경남FC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겼을 때 정말 모두 울었다. 한참 대구가 성적이 안 좋을 때였기에 더욱 승리가 감격스러웠다.

-'예그리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선수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예그리나'의 장점은 누구보다도 선수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원정버스도 없어서 개인차를 타고 원정 응원에 나선다. 여자들이지만 탐이나 걸개 같은 응원도구 전부 직접 들고 다니면서 제주까지 원정응원 간 적도 있다.

장남석 선수가 우리보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희는 깡패라고" (웃음). 상대 서포터즈 구역에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란다. 그만큼 선수들이 든든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성 서포터즈다보니 선수들과 이성으로서 가까워지거나 그런 오해를 받는 적은 없나

(폭소)우리가 유혹할 수 있는 외모도 아니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다. 선수들과 교류가 많긴 하지만, 아껴주는 오빠-동생처럼 지낸다. 성적이 안 나올 때는 많이 미안해 하기도 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선수 중 한 분은 우리 모두와 정기적으로 만나며 밥도 사주고 이야기도 많이 해준다. (기자: 그 선수가 누구인가?) 장남석 선수다. 우리에게 정말 많은 애정을 주셔서 늘 감사하다.

-'예그리나'에 가입하고 싶다면 어떻게 신청할 수 있나

'예그리나' 홈페이지(www.yegrina08.com)를 방문해 주기 바란다. 단순한 팬심이나 연예인 좋아하는 '오빠 부대' 같은 접근은 사절이다. '예그리나' 가입에 대한 유일한 조건은 N석에서 세 번 이상 서포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그리나' 인원이 많고 적고는 상관없지만, 더 많이 함께할수록 선수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테니 많은 분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예그리나'와 짧은 인터뷰를 갖는 동안에도 그들은 축구를 향한 진지한 자세와 대구FC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못했다. 인터뷰 후 열린 포항과의 K-리그 경기에서도 대구FC 서포터즈의 전체 숫자는 적었지만 '예그리나'의 '초고주파' 응원은 경기장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들의 응원 속에서 'K-리그 최하위 팀' 대구는 선전했지만 후반 종료 직전 두 골을 허용해 0-2로 석패하고 말았다. 특히, 후반전부터 갑자기 내린 폭우로 그라운드가 물웅덩이로 변해 제대로 된 경기력을 펼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전력공급 문제로 6개의 조명탑 중 3개밖에 켜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패배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예그리나'는 "비가 와서 시원했다. 경기도 잘하다가 막판에 아쉽게 실점을 내줘 패했다."라고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고, "우리도 아쉽지만 선수들 마음이 더 아플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해 선수들을 향한 변함없는 지지와 관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예그리나'는 구단과 시 운영의 미숙함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대구시에서도 세계육상선수권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 알겠지만, 대구 시민운동장의 낙후된 시설에 전력이 부족해서 조명도 제대로 못 키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구단에도 문제가 많다. 구단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노력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고백하건대 처음 '여성 서포터즈 모임'이라 했을 때 일말의 편견이 마음 한구석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그리나'와 마주해 이야기를 나누고, 경기 내내 땡볕과 빗속을 가리지 않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응원가와 그라운드를 향한 몸짓에서 그들의 축구를 향한 진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강성 클럽 '도미네이터'의 회원 유왕섭씨도 '예그리나'에 대해 "대구FC 서포터즈 목소리의 5할을 맡고 있다.(웃음) 늘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해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들 말대로 '예그리나'는 '여자'가 축구를 보는 모임이 아니라,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월드컵 XX녀보다 더 아름답고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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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 엑스포츠뉴스 정재훈 기자, 예그리나 제공].



전성호 기자 press@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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