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 손병하 축구 전문기자] 벨기에 프로리그 팀인 앤트워프에서 프로에 데뷔해, 같은 리그인 안더레흐트를 거쳐 잉글랜드 챔피언십리그의 울버햄튼과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레딩 FC까지. 설기현은 급하지 않게 조금씩 고지를 정복해 나가며 마침내 세계 최고의 프로 축구 리그를 자랑하는 프리미어리그에 우뚝 섰다.
지난 2000년 7월 광운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진출한 벨기에 프로리그에서부터 시작한 빅 리그에 대한 도전은, 꼬박 6년이란 시간을 채우고서야 프리미어리그라는 빅 리그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해외 진출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아온 설기현은 오는 19일 홈구장인 마제스키 스타디움에서 미들즈브러와의 프리미어리그 첫 경기를 시작으로, 9개월 동안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
'빅 리그'라는 첫 번째 꿈은 이뤘지만 이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목표를 세운 설기현. 프리미어리그에서 박지성과 이영표에 이은 또 하나의 코리안 돌풍을 기대하며 설기현의 06/07시즌을 미리 전망해 본다.
레딩, 탄탄한 수비 축구 구축한다.
잉글랜드 프로 리그의 2부 리그인 챔피언십에 속했던 레딩은 지난 시즌 31승 13무 2패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승점이 무려 106점으로 레딩의 이러한 돌풍은 챔피언십에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한 레딩의 전력 보강 1순위는 사실상 수비였다. 챔피언십 리그와 다른 차원의 수준을 자랑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면적인 전력 보강이 필요한 팀이었지만, 팀의 자금력이 풍부하지 않아 우선 수비수 보강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딩의 스티브 코펠 감독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수비다.’라고 말해, 수비를 중심으로 한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여름 시장에서도 설기현을 제외하면, 레딩의 여름 쇼핑은 온통 수비수였다. 실제로 래딩은 수비수 샘 소디에를 영입했고, 골키퍼인 그래엄 스택도 영입했다. 수비 강화를 통해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으려는 감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기존 수비진을 이끌었던 쇼레이와 손코, 잉기마르손 등이 정상급 팀들의 예리한 창을 어떻게 받아내느냐가 관건이 되겠지만, 탄탄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미드필더들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해 실점을 최소화하는 경기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레딩의 선택은 다소 무게감이 떨어지는 공격진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챔피언십에서는 게빈 도일, 데이브 킷슨, 글랜 리틀 같은 공격수들이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레딩의 무서운 질주를 가능케 했지만, 프리미어리그의 두꺼운 수비벽을 뚫어내기란 사실상 힘겹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설기현, 레딩에서 가장 비싼 사나이
그런 의미에서 레딩이 클럽 역사상 최고액인 15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공격수 설기현을 선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적료와 연봉을 포함한 150만 불은 첼시나 맨체스터 같은 거함들이 보기엔 우스운 돈이지만, 레딩으로서는 프리미어리그 승격에 대한 충분한 배려를 한 금액이었다.
수비 축구를 지향하면서도 가장 비싼 몸값의 선수로 공격수를 영입했다는 점은 설기현에 대한 코펠 감독의 믿음과 함께, 앞으로 설기현을 중심으로 공격진을 꾸려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같은 챔피언십 팀이었던 울버햄튼에 경기를 많이 보았던 코펠 감독이 설기현의 경기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레딩에서 최고 몸값의 선수가 된 설기현의 어깨는 무겁다. 그리고 레딩이 그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크다. 코펠 감독이 프리미어리그의 방패를 뚫을 레딩의 창으로 지목한 만큼, 설기현은 최전방에서 정상급 수비수들과 부딪히며 공격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 게다가 윙백이나 미드필더들의 공격 지원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설기현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시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측면 미드필더와 측면 공격수, 여기에 스트라이커까지 고루 오가며 분전할 것으로 보이는 설기현의 활약 여부에 따라 레딩이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할 수 있을 것인지가 결정되어 질 것이다.
프리시즌, 가능성을 열다
그런 설기현은 리그 개막을 앞두고 열린 프리시즌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비롯해 여러 위치에서 공격 임무를 수행한 설기현은, 프리시즌 9경기에서 5골 3도움을 기록하며 레딩 팬들의 기대에 충분히 보답했다.
특히 지난 7월 27일 열렸던 FC 밀월(리그 1)와의 경기에서는, 스트라이커 로레이 리타와 함께 투 톱으로 출장해 결승골을 터트려 팀의 1-0 승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측면 공격수가 아닌,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뛰었다는 사실과, 그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경기였다.
최근 어딘가 모르게 침체되어 있던 그의 플레이에 비로소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전에 보여주었던 빠른 판단에 의한 과감한 측면 돌파가 눈에 띄었다. 또, 공격 진영에서 많은 볼 터치를 하면서 수준급의 볼 터치 능력도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으며, 무엇보다 정확해진 골 결정력이 만족스러웠다.
지난 14일 영국의 공영 방송인 BBC로부터 ‘프리미어리그에 주목해야 할 새 얼굴 10’에 뽑히기도 했던 설기현은 이제 레딩의 가장 예리한 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리미어리그도 레딩이 선택한, 단 하나의 공격수인 설기현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아라
수비 조직력과 허리의 압박을 통해 프리미어리그에 도전하려는 코펠 감독의 또 다른 숙제는, 바로 레딩에서 가장 촉망받는 공격수인 설기현을 어떤 자리에 포진시켜 그의 능력을 극대화하느냐에 있다.
지난 프리시즌에서도 설기현을 측면 공격수와 미드필더, 중앙 스트라이커까지 고루 기용하며 그의 가능성을 테스트했었다. 비록 프리미어급에 해당하는 팀들은 거의 없었지만, 설기현이 보여준 활약은 어디에서건 제 몫을 해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설기현에게 가장 적절한 위치를 선정해주는 것이 약한 공격진에 가장 필요한 처방이란 점은 코펠 감독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딩의 전체적인 선수 구성이 떨어지고 수비에 치중하는 경기를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설기현이 동료 미드필더들의 많은 지원을 받으며 경기를 펼칠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맡는 것은 공격진의 화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전방 공격수로 포진할 리타나 도일 같은 공격수를 최대한 지원하며 자신도 득점에 가담하는 측면 공격수가 현재로서는 가장 최적의 포지션이다. 설기현 자신도 최전방보다는 측면이 플레이하기 편하다고 언급했던 만큼, 설기현은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는 측면 공격수로 시즌을 치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기 위해서 설기현은 좀 더 빠른 볼 처리와 상황 판단 능력을 길러야하고, 무엇보다 엄청난 경기 속도를 자랑하는 프리미어리그의 속도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또, 팀의 주축이 되는 허리가 약한 만큼 설기현으로서는 다른 공격수와 함께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꿈꾸며 그리워했던 빅 리그의 꿈은 이뤘다. 하지만, 이제부터 빅 리그 잔류라는 아니면 명문 클럽으로의 이적이라는 또 하나의 꿈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다시 한 번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레딩의 일원으로 보내는 이번 시즌의 중요성은 너무나 크다.
또 하나의 도전을 준비하는 설기현이 레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해 나갈지, ‘한국형 스나이퍼’인 그의 발끝에 한국 축구팬들의 기대가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