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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박스] 포항은 K-리그의 '서편제'가 될 수 있을까?

기사입력 2009.11.07 10:00 / 기사수정 2009.11.07 10:00

전성호 기자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국민학생' 시절 최고의 영화는 다름 아닌 '우뢰매'였다. 김청기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동급이었고 심형래는 영화배우이자 영웅이었다. 데일리는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이었으며 시중엔 우뢰매란 동명의 잡지까지 출간될 정도였다.

우뢰매가 개봉하는 날 극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고, 영화를 보고 나온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텀블링을 하며 에스퍼맨으로 변신하길 꿈꿨다. 심지어 우뢰매를 보기 위해 9살 때 처음 영화관에 혼자 가기를 감행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한국 최고의 영화는 우뢰매라 굳게 믿던 국민학생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거장'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었다. 100만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최초'란 말에 우뢰매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을, 어린 눈에는 한없이 지루해 보이는 판소리 영화가 넘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서편제가 한국 영화 최초 전인미답의 관중 동원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에 대한 재평가와 재인식이 시작됐다. 지금은 1천만이 넘는 관객이 들거나 수백억대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영화지만, 불과 15~20년 전만 하더라도 모든 극장은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가 점령하고 있었다. 한국 영화 보러 가기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러던 것이 서편제가 새 지평을 열며 한국 영화의 우울했던 모습은 변화한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을 낳은 한국 영화는 '3류'라는 편견의 틀을 깨고 양지로 나오게 된다. 한국 영화에 대한 깊은 편견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도 충분히 '돈이 된다'는 계산에 투자와 인재도 몰리기 시작했다.

서편제가 서막을 열었던 한국의 영화의 중흥과 산업화는 이후 '쉬리'의 대흥행으로 르네상스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1천만 이상 관객을 기록한 한국영화도 심심찮게 나오고, 한국은 세계적인 영화, 감독, 배우, 그리고 영화제를 보유한 엄연한 영화 강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서편제가 나오고 10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10년 전 에스퍼맨에 열광하던 그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올드보이'를 개봉일에 맞춰 관람했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자신도 모르게 감격에 겨운 박수를 보냈다. 한국 영화는 그렇게 성장했고, 달라져 있었다.

뜬금없는 웬 영화 얘기가 이렇게 긴가 싶겠지만, 기자는 가끔 한국 영화의 눈부신 발전사를 보며 K-리그의 중흥을 떠올리곤 한다.

불과 15~20년 전만 해도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 등에 밀려 맥을 못 춘 채 그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던 한국 영화는 서편제의 등장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역사성과 가능성을 터뜨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대표팀과 유럽축구에 편향된 관심과 대중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금의 K-리그 현실도 20여 년 전 한국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K-리그는 분명 나름의 실력과 재미, 가능성을 갖춘 축구 리그지만 대중의 전폭적인 관심을 끌기는 아직 역부족이다. 한국 영화가 겪어야 했던 만큼의 지독한 편견에 묶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한국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K-리그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K-리그와 달리 큰 인기를 누리는 대표팀 축구 역시 2002년 월드컵 4강의 근원적 힘이 돼 준 '붉은 악마'의 탄생 배경이자, 대표팀 축구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대중에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98 월드컵 최종 예선 당시의 '도쿄 대첩'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

기자는 11월 7일에 도쿄에서 열릴 2009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바로 그 계기가 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AFC 챔피언스리그는 올 시즌부터 대대적인 확대 개편을 통해 UEFA 챔피언스리그 못지않은 아시아 프로축구클럽 대항전으로 재탄생한 아시아 프로축구의 '꿈의 무대'.

그리고 그 결승전에 오른 팀은 다름 아닌 K-리그의 명문 클럽 포항 스틸러스다. 이 경기는  현재 K-리그와 아시아 프로축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를 대중과 축구팬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포항의 승리는, 서편제가 그랬듯이 K-리그에 새 지평을 열어줄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최강의 출연진

이번 챔스리그 결승전은 올 시즌 아시아 프로축구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자랑했던 두 팀의 맞대결이기도 하다.

20세기 아시아 최고 클럽이자 2004년과 2005년 AFC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달성한 사우디 아라비아의 명문클럽 알 이티하드는 이번 챔스리그도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치른 11경기에서 무려 29득점(9실점)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FC서울을 제치고 4강에 올랐던 움 살랄(카타르)을 7-0으로 이겼고, 4강전에서 나고야 그램퍼스(일본)을 6-2로 꺾는 등 2차전 합계 8-3으로 물리치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했다.

또한, 알 이티하드는 'K-리그 킬러'라 불릴 만큼 전통적으로 K-리그에 강했던 팀이다. 1999 컵위너스컵에서 전남 드래곤즈를 3-2로 이긴 것을 시작으로 2004 챔피언스리그에선 4강에서 전북 현대를 이겼고, 결승에선 성남 일화를 꺾고 우승했다. 특히 결승에선 1차전 홈에서 성남에 1-3으로 패배했지만, 2차전 원정을 무려 5-0으로 승리, 대역전 드라마를 쓰는 데 성공했었다. 이듬해 역시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2경기에서 5-0, 2-0으로 압승을 거뒀다.

오죽하면 K-리그 팬들이 알 이티하드를 '아시아의 깡패'라 부를까? 알 이티하드는 챔피언스리그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현재 개막 후 4연승을 기록 중이다.

알 이티하드는 사실상 사우디 아라비아 국가대표팀의 클럽 판이라 봐도 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다. 팀의 수장인 가브리엘 칼데론 감독은 지난 2005년 사우디 대표팀을 이끌고 최종예선에 나서 한국에 2패(그렇다. 조 본프레레 당시 대표팀 감독의 경질 사유가 된 바로 그 2패)를 안기는 등 무패로 사우디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성공시킨 바 있다.

'사우디의 비에이라' 주장 모하메드 누르, 골키퍼 마브루크 자이드를 주축으로 사우디 국가대표들이 대거 포진한 것은 물론, 지난 시즌 리그 득점왕 히참 아부셰루앙(모로코)과 튀니지 국가대표 공격수 아민 셰르미티 등 외국인 선수까지 그 전력이 막강하다. 한 가지 포항에 다행인 것은 사우디가 사랑하는 천재 공격수 나이프 하자지가 부상으로 결장한다는 사실.

알 이티하드가 서아시아 최강의 클럽으로 군림하고 있다면, 포항은 올 시즌 동아시아 프로축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K-리그 챔피언, 2008년 FA컵 우승팀인 포항은 얼마 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가 발표한 '전 세계 클럽랭킹'에서도 70위(알 이티하드 83위)을 기록하는 등 최근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는 클럽이다.

포항은 이번 대회에서도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포항은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7승 3무 1패 22득점(8실점)을 기록했는데, 특히 16강부터의 행보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16강 단판 승부에서 만난 뉴캐슬 제츠(호주)를 6-0으로 대파했고, 8강에선 브라질의 두 축구영웅 필 스콜라리 감독과 히바우두가 이끄는 분요드코르를 상대로 1차전 1-3 패배를 극복하는 2차전 4-1 승리를 거두며 대역전에 성공했다. 4강에서는 움살랄을 압도하며 2전 전승을 거뒀다.

K-리그에서도 포항의 기세는 무서웠다. 포항은 올 시즌 정규리그, 컵대회 및 챔피언스리그 등 모든 대회를 포함해 치른 홈 24경기에서 15승 9무를 기록,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얼마 전 끝난 정규리그에선 2위를 기록, 내년도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확보하며 3년 연속 출전에 성공하기도 했다. 동시에 포항은 이미 우승을 거둔 컵대회를 비롯하여 K-리그, AFC챔피언스리그까지 동시 석권을 노리며 3관왕의 위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포항은 특출난 스타플레이어가 이끄는 팀은 아니다. 그러나 눈을 뗄 수 없는 역동적인 경기력,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 차가 거의 없는 탄탄한 선수층, 상대에 따라 구사하는 다양한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는 축구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경기력, 매너 등에서 혁신적인 자세를 추구하는 '스틸러스 웨이'의 시행으로 어느덧 K-리그는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멋진 팀으로 거듭났다. 

이런 두 팀이라면 AFC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어울리는 최고의 캐스팅이란 말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이것만으로도 어쩌면 서편제 못지않은 작품성과 흥행성은 확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우승의 영향력



서편제의 한국 영화 최초 100만 관객 돌파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최고의 결과였다. 그랬기에 대중과 영화팬의 관심과 호응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여서 가장 극적인 주목을 받는 경우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경우다.

포항이 만약 알 이티하드를 꺾고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면? 포항은 아시아 클럽 챔피언 자격으로 12월 UAE에서 열리는 FIFA클럽월드컵에 출전한다. 경우에 따라서 (물론 약간의 대진운도 따라야겠지만) 포항은 지난해 유럽챔피언 FC바르셀로나와 '맥빠지는' 친선경기가 아닌 세계 최고의 클럽자리를 놓고 벌이는 진검승부를 펼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바르셀로나를 꺾는 진정한 '파리아스 매직'을 연출하며 우승이라도 차지하는 날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다.

포항의 재밌고 멋진 축구가 아시아를 제패하고, 세계무대에서도 그 역량을 발휘한다면 이는 K-리그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포항은 다른 K-리그 클럽들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고, 그 영향력이 리그 전체로 퍼져나갈 때 K-리그의 작품성과 대중성은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임이 분명하다.

포항이 챔스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클럽월드컵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둘 경우 생기는 금전적 이득도 상당하다. 포항은 챔스리그 결승까지 오르는 동안 승리 수당 등을 통해 69만 달러의 상금을 이미 챙겼다. 여기에 챔스리그에서 우승할 경우 상금 150만 달러에 클럽월드컵 최하위 상금(100만 달러)을 확보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포항은 319만 달러(약 38억 원)의 엄청난 부수입을 획득한다.

나아가 클럽월드컵의 우승상금은 무려 500만 달러이며, 6강 토너먼트로 치러지는 대회 첫 경기에서 지더라도 5-6위전에서 승리할 경우 추가로 100만 달러를 더 확보하며 총 50억 원 정도를 벌어들일 수 있다. 한 마디로 상금 대박이다.

포항이 이처럼 AFC챔피언스리그를 통해 인기와 금전적 측면에서 엄청난 이득을 창출할 경우 앞으로 K-리그 타 클럽들의 AFC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는 K-리그를 더욱 풍성하고 즐겁게 해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반 대중과 축구팬 역시 AFC챔피언스리그와 K-리그에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수 있다.

K-리그에 대한 편견 타파

서편제의 흥행 돌풍이 한국 영화에 가져다준 가장 큰 의의는 그 전까진 시간 남아도는 짓이란 비아냥을 받던 '한국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포항의 AFC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선전은 K-리그에 대한 편견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90년대 말 한 때 MLB의 인기에 밀려 주춤하던 프로야구는 올 시즌 관중동원 신기록을 수립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 전부터 부각된 부산팬들의 열정적인 롯데 응원이 야구장에 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대중에게 심어준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포항이란 도시가 스틸러스와 함께 축구장에 놀러가는 것의 즐거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면 그 자체로 K-리그에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게 분명하다.

포항의 매력적인 축구는 이미 K-리그에 무관심했던 축구팬들의 마음까지도 서서히 사로잡고 있다. 특히 연고지에서의 인기는 절대적이어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 전용구장 스틸야드는 늘 많은 관중과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고, 이번 결승전을 앞두고는 포항 시내에서 길거리 응원까지 펼친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포항이 우승을 거둘 경우 그 인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고, 조용하지만 자부심 넘치는 이 대한민국 남부의 산업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과 환희 속에 휩싸일 수 있다.

토요일 가을 저녁에 포항 시내가 우승을 자축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인파로 가득하고, 우승컵을 들고 돌아온 스틸러스가 주말 시내에서 펼칠 우승 기념행사에 시민들이 발디딜 틈 없이 모이는, 남미나 유럽에서나 볼법한 장관이 펼쳐지길 바란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설령 그 정도의 엄청난 반응은 아닐지라도 아시아 제패를 통해 마치 롯데 자이언츠가 부산 시민들에게 그렇듯이 스틸러스가 포항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팀이 될 것이란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자부심은 더욱 많은 숫자의 관중이 더욱 뜨거운 열기로 매주 스틸야드를 가득 채우는 결과를 보여줄 것이고, 포항은 K-리그 관람이 얼마나 즐겁고 가치있는 일인지, K-리그 팀을 응원하는 것이 얼마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중소도시에 불어든 축구 열풍과 이를 통한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은 대한민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도 좋은 귀감이 될 것이고, 이는 2부리그 창설 등을 위해 반드시 전제돼야 할 중소도시 축구클럽 창단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처럼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단순한 하나의 결승전이 아닌, K-리그와 한국축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물론 너무 많은 기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올 한해 포항이 보여준 경기력과 개혁의 노력은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고, 'K-리그 르네상스'의 선구자란 칭호를 누릴 충분한 자격이 된다.

과연 포항은 K-리그의 '서편제'가 될 수 있을까? 떨리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11월 7일 도쿄 국립경기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C) 엑스포츠뉴스 박진현 기자,  포항 스틸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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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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