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10.21 19:18 / 기사수정 2009.10.21 19:18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부상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시련을 겪은 것이 저에게 소중한 교훈을 줬다고 봐요. 배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도 부상을 당한 이후부터였습니다"
현대건설에서만 10년 넘게 뛴 한유미(27, 현대건설)는 한국 여자배구를 대표한 공격수 중 한 명이었다. 강한 파워에 절묘한 공격센스까지 갖춘 한유미는 1999년에 벌어진 세계유스대회에 출전해 득점 상을 받은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2000년 현대건설에 입단한 뒤, 그녀의 배구 인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LG 정유(GS 칼텍스의 전신)와 함께 여자배구 최고 명문구단이었던 현대건설에 입단한 한유미는 입단 첫해에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팀 우승의 기쁨도 일찍 누렸다.
대표팀에 발탁된 한유미는 국가대표 주포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너무 일찍 얻었던 한유미에게 시련도 일찍 찾아왔다.
2007-2008 시즌, 현대건설은 극심한 부진에 빠지면서 최하위에 머물렀다. 또한, 선수를 보강하며 야심 차게 시작한 2008-2009 시즌에도 현대건설은 최하위 탈출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황현주 신임감독이 부임한 이후, 현대건설은 다른 팀으로 탈바꿈했다. 지난여름에 벌어진 2009 IBK KOVO컵 대회에서 현대건설은 준우승을 차지하며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현대건설의 전력 상승에는 어린 선수들의 성장이 가장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팀의 정신적 지주인 한유미의 존재는 여전히 현대건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명가 구단의 진가는 이번 시즌에 부활한다
현대건설이 최하위에 머물었던 2007-2008 시즌, 팀이 거둔 승수는 겨우 4승에 불과했다. 4승을 올리는 동안 24번 패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팀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이숙자(29)와 정대영(28, 이상 GS칼텍스)이 팀을 이적했고 몇몇 선수들도 코트를 떠났다.
팀에 남은 선수는 한유미와 프로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어린 선수들이었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세대교체 속에 한유미는 주장을 맡았다.
"평소 의지했던 선수들이 모두 팀에서 떠나 많이 힘들었어요. 배구선수로서 20대 중반이면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닌데 팀에서는 '맏언니'가 됐죠.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나간다는 점이 쉽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도 순식간에 찾아와 마음고생이 심했었어요"
2007-2008 시즌은 한유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 다음해인 2008-2009 시즌은 최하위에서 벗어났지만 팀의 전력을 100% 발휘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러나 다가오는 2009-2010 시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대건설은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프로 3년차에 접어드는 국가대표 센터인 양효진(20, 센터)의 기량이 물이 올랐고 이탈리아와 일본리그에서 검증받은 공격수인 케니 모레노(31, 콜롬비아, 라이트)가 가세했다. 또한, 젊은 선수들이 2년 동안 호흡을 맞추면서 팀의 조직력도 점점 상승하고 있다.
"연습을 하면서 팀이 많이 향상된 것을 느껴요. 하지만, 올 여름에 벌어진 KOVO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경기내용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결과는 좋았지만 힘들게 승부한 경기가 많았어요. 생각만큼 리시브가 안 된 경기도 있었고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경기도 있었죠. 상대가 강하면 바짝 긴장하고 들어가서 플레이가 잘 풀렸는데 반대로 팀이 느슨하게 나오면 그 분위기에 끌려간 경우도 있었어요. 이러한 점은 이번 시즌에 개선돼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한국 여자배구 최고의 선수인 김연경(21, JT 마베라스)이 일본리그에 진출한 이번 시즌은 독주로 나설 팀이 없는 상황이다. 현대건설 초년 시절에 우승의 기쁨을 누린 한유미는 이번 시즌이야말로 '명가의 재건'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한유미는 6년 동안 달갑지 않은 무릎부상을 안고 있다. 매 시즌을 치르면서 크게 다치지 않으려는 것이 한유미의 목표가 됐다. 올 봄에 또 한 번의 무릎 수술을 받은 한유미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 재활 훈련을 반드시 실행하고 있다.
"제가 소화하는 전체 훈련 중, 재활 훈련이 전술 훈련보다 비중이 커요. 재활 훈련을 소홀히 하면 어느새 몸에서 신호가 오죠. 이번 시즌은 철저한 재활 훈련으로 몸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황현주 감독님도 웨이트와 재활을 강조하고 계세요"
부상이 없었다면 더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숙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점에 만족한다
주니어대표 시절과 실업 초년생 시절, 한유미는 거침이 없었다. 한유미가 때리는 스파이크는 여자선수로서 보기 드문 파워가 넘쳤다. 또한, 상대 블로킹과 코트의 빈자리를 노리는 센스도 갖추고 있었다.
현대건설에 입단한 뒤, 곧바로 주전선수로 뛴 한유미는 국가대표 레프트 자리도 도맡았다. 한유미가 한국 여자배구의 '차세대 거포'가 된다는 점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무릎 부상은 한유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년 동안 코트를 떠나 있으면서 한유미의 발전 속도는 많이 저하됐지만 오히려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기량 적으로는 더 좋은 선수가 됐을 수 있었겠죠.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많지만 결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몸은 다쳤지만 내면은 성장할 수 있었어요. 저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고 배구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됐던 거죠. 현대건설에 입단하자마자 신인상 받고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하면서 찬란한 순간을 쉽게 얻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정도로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잘나갔던 시절에는 배구로 인해 얻어지는 대가가 당연하게 오는 줄 알았어요. 이러다 보니 자만심에도 빠졌었죠.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배구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한동안 코트를 떠나있으면서 한유미는 밑바닥에 있는 선수들의 심정도 알게 됐다. 어릴 때부터 승승장구하던 선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상황을 체험한 한유미는 배구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됐다.
"솔직히 위에 있는 선수들은 소외된 선수들의 심정을 잘 몰라요. 저도 예전에는 그랬었는데 시련을 겪으면서 그러한 선수와 제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운동을 의무적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한동안 볼을 만지지 못하면서 배구의 소중함도 알게 됐죠. 누가 시켜서 하는 줄 알았던 배구를 저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있었는지를 그때 알게 됐습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시기에 찾아온 부상은 한유미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리고 배구에 대한 열정을 새롭게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27세, 지금이 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전성기'이다
20대 중반에 팀의 리더역할을 맡은 한유미는 "우리 팀에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실제보다 나이가 많고 노장인 줄 안다"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외국의 경우, 30대가 훌쩍 넘은 경우에도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로 배구는 구력이 중요한 종목이다. 오랫동안 코트에서 볼을 만져봐야 비로소 배구에 눈을 뜨게 되고 다양한 플레이에 익숙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저는 26세부터 노장이란 소리를 들었어요.(웃음) 배구 선수로서 20대 중반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거든요. 외국 같은 경우, 배구는 27세에서 30대 초반이 돼야 비로소 잘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요. 구력도 쌓이고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국내의 경우는 20대 중반만 되도 노장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실제로 현대건설에 영입된 케니 모레노도 31세의 선수이다. 케니는 이탈리아와 일본에 있을 때, 자신이 결코 많은 나이가 나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선수들로 구성된 현대건설에 온 뒤,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저는 예전부터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저와 (김)사니(28, KT&G 아리엘스)는 '무조건 10년 이상은 하자'라고 말했었죠. 맘 같아서는 오래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줄지 모르겠어요. (웃음) 앞으로의 몸 관리가 중요하겠죠"
버릴 수 없는 올림픽에 대한 꿈, 2012년 런던올림픽에 도전하고 싶다
절친한 친구인 김사니는 올림픽 출전 경험이 있지만 한유미는 아직도 올림픽 무대에 서보지 못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찾아온 불청객인 부상이 한유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현재 여자대표팀은 세대교체 중에 있지만 기회만 된다면 다시 참가해보고 싶은 속마음도 비쳤다.
"꼭 올림픽을 앞두고 다쳐서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어요. 이 점이 아쉬웠는데 몸만 허락한다면 2012년 올림픽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때가 되면 서른이 넘겠지만 배구 선수로서 충분히 뛸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꿈을 쉽게 접고 싶지는 않아요"
한유미는 '일본 킬러'로 불릴 만큼, 일본전에 강했던 선수였다. 가장 근래에 한유미가 일본전에서 선전한 경기는 2006 세계선수권대회였다. 비록, 팀은 세트스코어 1-3으로 패했지만 한유미는 팀 내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며 고군분투했다.
"왠지 일본만 만나면 바짝 긴장감이 올라오고 투지심도 타올랐어요. 일본이라고 하면 반드시 이겨야 될 상대였기 때문이죠. 몇 년 동안 계속 일본에 패하고 있는데 선수 개개인의 기량을 보면 크게 뒤처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전체적인 시스템과 조직력이죠"
실제로 일본 여자국가대표팀의 코치는 주니어 대표팀 감독을 거쳐야 된다. 또한, 주니어 대표팀 감독은 유스 대표팀 지도자를 거쳐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렇게 체계적인 틀에서 성장한 선수들은 국가대표까지 유스시절부터 받아온 훈련과 조직력을 유지한다.
최근 벌어진 제15회 아시아 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태국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현재 태국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 유스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멤버들이다. 장시간 동안 서로 호흡을 맞추다 보니 최고의 조직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올림픽 진출을 꿈꿔온 동료와 함께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유미는 밝혔다. 또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국제무대에 참가해 일본에 당하고 있는 연패의 사슬을 끊고 싶다고 덧붙였다.
올 시즌 목표는 우승, 그리고 배구를 끝까지 즐기며 하고 싶다
프로리그가 출범했지만 여자배구 지망생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히, 프로리그의 ‘젖줄’인 학생 배구팀의 해체는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미래의 프로 선수와 국가대표를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한유미는 “가능하면 꿈을 크게 가져라”는 말을 남겼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국내리그에서 성공하는 것을 넘어 (김)연경이처럼 해외진출도 꿈꾸는 목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넓은 무대로 나가서 많은 것을 배워오고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점이 정말 필요하죠. 목표를 크게 가질수록 배구 자체를 더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올 시즌 한유미의 구체적인 목표는 팀의 우승이다.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 나가 선전을 펼치는 것이다. 선수생명의 위기까지 닥쳐온 시련을 겪었지만 한유미는 그 상황을 극복하고 배구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배구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싶다고 대답한 한유미는 자신의 무대인 코트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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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유미 (C) 엑스포츠뉴스 조영준 기자, 현대건설 (C) 엑스포츠뉴스 박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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