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중간 계투'의 의미가 과거엔 크게 부여되지 않았다. 선발을 하기엔 구위가 떨어지고, 그렇다고 마무리를 하기도 힘든 선수들이나 젊은 어깨를 가진 선수들이 땜질식으로 등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LG 트윈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광한 감독이 당시 생소했던 '스타 시스템'이라는 투수 분업화를 시도, 강봉수 - 민원기 투수에게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라는 보직을 맡겨 팀 마운드의 분업화에 성공했다. 이후 94년 한국시리즈 우승 - 95년 정규시즌 2위의 호성적을 이끌어내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대적인 흐름이긴 했지만 점점 투수들의 분업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로 굳어졌고, 최근 프로야구에선 중간계투 특히 경기 중-후반 승부처에서 상대팀의 좌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올라오는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의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장에서 잠깐 화장실을 갔다오면 언제 등판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짧고 굵게' 던지는 선수들 중 각 팀에서 돋보이는 선수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차돌' 같은 근성있는 투구로 팀의 승리를 지킨다 - 한화 차명주
▲ 한화 이글스 차명주
박찬호 - 정민태와 같은 한양대 동문인 차명주는 1996년 롯데에 계약금 5억원을 받고 입단할 때만해도 정말 기대되는 '좌완 선발투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신인이던 96년 고작 46이닝을 던져 2승 6패 8세이브에 7.43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남기고, 98년까지 롯데에서 통산 9승 21패 8세이브라는 '돈 값' 못하는 활약을 펼치다가 99시즌을 앞두고 결국 포수 재원이 넘치던 최기문과 맞트레이드되어 두산으로 이적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그러나 차명주 입장에선 결국 이 트레이드가 '전화위복'이 된 결과가 되었다. 두산 이적 원년인 99년 총 83경기에 출장 76.1이닝을 던져 1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4.01로 호성적을 올렸던 그는 이후 2004년 시즌 중 당시 감독이던 두산 김경문 감독에게 '미운털'이 박혀 한화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총 홀드왕 세 번을 비롯해서 2003년까지 5년간 363경기에 출장 한해 평균 74경기에 나올 정도로 맹활약을 펼치며 두산 허리를 책임졌다.
비록 지난 시즌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로 시즌 중반 한화로 트레이드 되기했지만, 이적 이듬해인 올 시즌 72경기나 등판해서 4승 무패 11홀드에 5.17의 방어율을 기록중인 차명주는 140km대 초반 직구에 슬라이더 - 체인지업등을 앞세워 타자를 맞춰잡는 스타일로 한화 중간 마운드의 기둥역할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
무너진 LG 마운드의 든든한 버팀목 - LG 류택현
▲ LG 트윈스 류택현
올 시즌 무너진 마운드 때문에 하위권으로 처진 LG. 하지만, 프로 년차의 노장 류택현의 활약은 실로 대단하다.
9월 12일 현재 63경기에 등판 4패 11홀드 3.56의 방어율로 겉으로 드러난 성적은 '그저그런' 성적이지만, 대다수의 원포인트 릴리프들이 그렇듯이 류택현 역시 드러난 성적을 이외에 알토란같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1994년 당대 최고의 유격수였던 유지현을 버리고 OB(현 두산)이 그를 지명했을 정도로 좌완이라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OB 시절엔 전형적인 '새가슴' 스타일로 좀처럼 자기의 확실한 역할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1999년 당시 김상호와 함께 LG로 트레이된 이후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그는 2001년 77경기 등판 2패 4.11의 방어율로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고, 이듬해인 2003년에도 75경기 출장(1승 2패 방어율 3.11) - 2004년에는 2001년 차명주가 세워놓았던 투수 최다 등판(84경기)를 기록을 갱신하는 85경기(0패 1세이브 방어율 3.38)에 등판해서 승부처에서 팀이 어려울 때마다 등판해서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마운드를 내려가곤 했다.
올 시즌은 팀 마운드의 사정상 가끔 선발로 '외도'를 하기도 했던 그는 역시나 직구는 그리 빠르지않지만, 체인지업 - 슬라이더 - 커브등 거의 왠만한 변화구를 다 구사할정도의 노련함으로 상대 타자들을 제압하곤 한다.
후배인 민경수 - 김광우 - 신재웅때문에 설 자리가 좁아들수도 있었지만, 꾸준히 위기상황에선 그를 등판시키는 걸 보면 그만큼 코칭스테프 입장에선 아직 충분히 통할만한 구위를 가지고 있는 류택현은 훈련이나 경기장외에서도 후배들을 다독거리고 귀감이 될만한 성실한 자기관리로 앞으로도 좋은활약이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차세대 두산 마운드를 이끌어나갈 'Golden Boy' - 두산 금민철
▲두산 베어스 금민철
180cm에 76kg. 야구선수라고 하기엔 호리호리해보이는 체구이지만, 마운드에만 서면 그는 신인답지않은 볼배합과 빼어난 제구력을 앞세워 상대팀 타자들을 요리하는 배짱을 가진 '겁없는 신인', 바로 두산 금민철이다.
그 동안 좌완 원포인트 - 롱 릴리프를 책임지던 이혜천이 올 시즌 5선발로 돌아서면서 좌완 불펜진을 맡게 된 금민철의 주 임무는 경기 중반 상대팀의 좌타자를 막는 임무를 맡고있지만, 최근 들어선 선발이 곧잘무너지면 롱릴리프로 등판해서 본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동산고를 졸업 계약금 4,500만원을 받고 입단했을 때만해도 '6억 루키' 김명제나 '5억 루키' 서동환에 밀려 그리 주목을 받지못했으나 좌투수라는 장점을 살려 두산 불펜진에서 가장 필요한 선수 중의 하나로 점점 거듭나고 있다.
프로에 와서 구속이 10km정도가 더 늘었을 정도로 2군에서 하체 움직임을 바로 잡고나서 공이 눈에 띄게 좋아진 그는 지금은 140km대의 직구와 120km대의 변화구를 구사하는데, 타자 몸쪽으로 붙이는 과감한 승부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리오스 영입을 위해 두산이 '차세대 좌완유망주'였던 전병두를 트레이드카드로 서슴없이 내민것도 결국 금민철이라는 믿을맨이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다.
포스트 시즌에서도 주 임무는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가 될 공산이 크지만, 앞으로 무럭무럭자라 두산 마운드의 핵심으로 떠오를 금민철의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화려한 프로세계의 묵묵한 조연들에게도 관심을
프로스포츠는 정말 '극과극'을 달린다. 실력만 있으면, 수십억을 검어쥘수도 있고, 팀내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냉정하게 내쳐지는 현실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프로다.
그러한 정글과 같은 생존 법칙이 존재하는 프로세계에서 중간계투. 특히나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 라는 것은 어찌보면 정말 하찮고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많아지는 수준급 좌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해 줄 그들이 없다면, 팀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낼 마무리가 등판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팀의 승리도 확실히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팀의 승리를 위해 묵묵히 자기역할을 수행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원포인트 릴리프 투수들에게 오늘 한 번 중계든 경기장에서든 완봉승을 거둔 선발투수나 세이브를 올린 마무리 투수 못지않은 우렁찬 함성과 박수를 보내주는건 어떨까? 그들이 있기에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승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