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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을 비추는 '등대'로 남은 조오련의 도전정신

기사입력 2009.08.05 16:20 / 기사수정 2009.08.05 16:20

조영준 기자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지난 4일,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한 故 조오련(57) 씨의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점칠 되었다. 전남 해남고 1학년 시절, 수영선수가 되기 위해 자퇴서를 내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조오련은 구두닦이와 간판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실내 수영장에 가기 위한 돈을 마련해나갔다.

YMCA 실내수영장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던 조오련은 마침내 자신의 흘린 땀의 보상을 받게 됐다. 재학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일반부로 참여한 전국체전에서 조오련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수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던 조오련의 열망은 결실로 이어졌다.

이 대회의 우승은 조오련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 수영계의 ‘흙속의 진주’였던 조오련은 양정고에 스카우트돼 본격적인 수영선수로 활동하게 된다. 1970년에 벌어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조오련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수영역사상 최고의 쾌거를 이룩해 낸 조오련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74년 테헤란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조오련은 400m와 1500m에서 2연패를 이룩했다. 아시아에서 상대가 없었던 조오련이었지만 세계무대의 높은 벽 앞에선 쓴맛을 봐야만 했다.

야심 차게 출전한 72년 뮌헨올림픽에서 예선 탈락에 그친 조오련은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접영 2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6세의 나이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둔 조오련은 은퇴를 선언하고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평범한 지도자 생활을 하며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다른 선수에 비해 조오련은 '위풍당당'하게 돌아왔다. 1972년 일본의 다카마 쇼지가 실패했던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한 조오련은 13시간의 사투 끝에 성공했다. 1980년, 한국 수영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업적을 일궈낸 조오련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제나 도전과제를 찾아다녔던 그는 2년 뒤, 영국 사이를 물살을 가르며 횡단했다. 대한해협에 이은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한 조오련은 한국인의 지칠 줄 모르는 투혼을 전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성공만큼, 좌절도 많이 찾아왔다. 사업 실패와 교통사고, 그리고 2001년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난 사연은 조오련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부인과 사별한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다.

이러한 현실을 이겨낸 활로는 결국 '수영'이었다. 조오련은 2005년 두 아들인 조성웅과 조성모와 함께 울릉도와 독도를 18시간 만에 횡단했다. 평소 독도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프로젝트'에 도전해 성공했다.

험난한 파도가 밀려오면 물살을 헤치고 전진하는 것이 그의 극복방법이었다. 지금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조오련은 제2차 대한해협 횡단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온 비보는 모든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환갑을 바라보고 있던 조오련의 '마지막 도전'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제2차 대한해협 도전을 위해 물살을 가르는 조오련의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불굴의 도전 정신은 대한해협을 비추는 등대의 불빛으로 남아있다.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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