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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삼국지] 하이원 엄현승, '기적'을 만드는 벽의 꿈

기사입력 2009.02.15 17:03 / 기사수정 2009.02.15 17:03

김경주 기자



[엑스포츠뉴스=김경주 기자]
고대 링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담담하고 담백했다. 큰 목소리를 낸다거나 감정 표현이 크지도 않았다. 지난 시즌 빛났던 것과는 달리 어두웠던 이번 시즌이 힘들고 답답했을 텐데도 흐르는 물 마냥 다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화려해 보이지만 그보다 무겁고 외로운 자리인 골리. 동료는 내 등을 지고 섰고, 상대는 나를 보고 달려와 덤비는데도 즐겁다고 말한다.

보기만 해도 무거운 그 무장이 이젠 적응이 돼서 무거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엄현승이지만, 크레인스를 이기고 다시 한라와 '코리안 더비'를 치르고 싶다고 말할 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천상, 빙판이 어울리는 소년이다.

이번 시즌은 지난 시즌에 비해 저조했다.

엄현승 (이하 엄) : 모든 것이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시즌에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팀도 그렇고 워낙 성적이 잘났었기 때문에 올 시즌 어떤 성적이 나도 지난 시즌이랑 비교될 수밖에 없다. 더 잘 나오지 않는 이상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더 좋은 성적은 우승 아닌가. (웃음) 전체적으로 개인 성적도 나지 않고 하다 보니까 분위기도 덩달아 안 좋게 됐다. 시즌 중반부터는 플레이오프 진출만을 생각했다. 일단 플레이오프에 나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플레이오프를 크레인스와 붙는다

: 확실히 어려운 팀이다. 07-08 프리 시즌에 한 번 이기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이겼다. 연장까지 가서 진 적도 있고 그렇긴 한데, 붙어보면 잘하는 팀이라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골리다 보니까 슈팅이 날아오는 걸 막을 수밖에 없는데, 크레인스는 슛도 많이 하는 편이다.

일방적으로 경기 자체가 밀린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골 찬스가 났을 때 그 찬스를 골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확실히 있는 팀이다. 노련함이 가장 큰 무기인 팀이고.

원정의 부담도 크겠다

: 삿포로가 요즘 축제 기간이라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서 경기 전날인 16일에 출국한다. 삿포로에서 크레인스의 홈 빙상장이 있는 쿠시로까지 이동하는데도 기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데 걱정이다. 가서 한 번 정도 빙판 운동하고 경기할 것 같다. 이동 시간이 길어서 컨디션에 대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느 팀이랑 붙었으면 했나

: 시즌 막판까지 원래 오지가 4위였고, 크레인스가 3위였지 않나. 그 순위가 그대로 가길 바랐다. 그래서 오지와 붙었으면 했다. 그런데 시즌 막판에 그 순위가 다 뒤집혔다. 크레인스가 3위를 했고, 오지가 4위로 내려오고. 아무래도 크레인스보다는 오지가 조금 편하긴 하다.

플레이오프 준비는 많이 했나

: 설까지 쉬고, 그 이후부터 계속 운동했다. 11일에 동계 U대표랑 연습 경기를 했는데 훈련 재개 후 처음으로 가진 연습 경기였다. 7-1로 이기긴 했는데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실업팀이랑 어느 정도 실력 차이가 나는 팀이랑 치른 경기다 보니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13일에도 고려대랑 연습경기를 하고 출국 준비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준비를 다 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선 딱히 부상선수도 없어서 전력을 발휘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 준비하면서 모든 것이 많이 좋아졌다.

마지막 경기에서 아쉽게 졌다

: 한라랑 하면 다른 때보다 힘들다. 올 시즌 한라는 우승할 만한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골도 잘 넣고 용병도 확실히 좋았고, 그래도 한라한테는 지기 싫다. 아시아리그에서 우리랑 단둘뿐인 한국팀이니까. 코리아 더비라는 이미지가 확실히 만들어졌지 않나.

마지막 경기할 때 사실 연장전까지 가서 우리가 이기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이긴 경기가 되고, 한라도 우승할 수 있으니까. 져서 아쉽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우리는 5위가 확정된 상황이어서 이기든 지든 순위에 차이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래도 한라한테는 이겼으면 했다.

세 번째 골이 더욱 아쉬웠겠다

: 그날 경기 자체는 정말 재밌게 했다. 세 번째 골이 사실 한라가 잘 넣은 것도 그렇지만 수비와 내 실수가 컸다. 안 먹어도 될 골이었는데 먹었다 싶었다. 그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흥분했었는데, 그냥 그 후에는 경기가 그렇게 되려나 보다…. 하고 말았다.

워낙 리그 막바지로 갈수록 한라가 분위기가 좋아져서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3-2 정도면 준수한 결과 아닌가. 세이부한테 다섯 골 주고 아홉 골 넣어서 이기는 게 한라였다. (웃음)

한라와 만나려면 크레인스에 이겨야 한다

: 일단 목표는 최종 결승까지 가는 것이 목표다. 아직까지 한국팀이 플레이오프에서  1승을 해본 적이 없다. 한라보다 일찍 플레이오프를 시작하긴 하지만 크레인스에 이기면 처음으로 한국팀이 1승을 챙기게 된다. 정규리그 첫 우승은 한라가 했으니까, 플레이오프 첫 승은 우리가 했으면 좋겠다. 크레인스에 이기기는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래도 플레이오프가 코앞이다 보니 크레인스와의 대결과 한라와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문득, 골리로서의 엄현승이 궁금해졌다.

처음 아이스하키를 시작했을 때부터 골리였나

: 처음부터 골리로 시작했다. 난 학교가 아니라 클럽팀에서 먼저 시작했다. 재밌었다. 명지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내 위에 형이 한 명 있다. 형이 경성중에 다니던 시절에 그 학교 아이스하키부 부장 선생님이 스카우트를 위해 초등학교를 돌곤 했었다.

그 당시에 형과 내가 모두 키가 컸었다. 형에게 먼저 운동을 하자고 제의를 했었다. 형이 운동을 시작하고 나는 주로 구경하러 다녔었다. 형이 운동하던 팀에서 마침 골리가 없었는데 구경만 하지 말고 골리를 한 번 해보라고 해서, 무장을 입게 됐다. 운동을 먼저 시작한 형은 부상을 많이 당해서 대학교 때 운동을 그만두고 나만 하고 있다.

지금 키는?

: 175cm다. 그때 이후로 안 컸다. (웃음)

골리라는 포지션의 매력은 뭔가

: 자기와의 싸움을 한없이 할 수 있다는 점? 어렵고 힘들고 외롭다. 겉보기에는 일반 플레이어들보다 무장도 더 큰 걸 차고 있고 하다 보니까 화려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장은 무겁지 않나) 어릴 때부터 계속 입어서 그런가. 무겁다는 생각은 안 한다.

골리는 너무 외롭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이겨내야 한다.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으니까. 시합하다 보면 화도 많이 나고 순간적으로 욱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런 흥분 하나하나가 골리에게는 엄청난 손해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원래 성격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두는 편이라 어떻게 보면 골리에 딱 어울리는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새 골리가 들어왔다

: (김)유진(고려대 졸업예정)이랑은 아무래도 학교도 달랐고,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도 다르니까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 않을까? 선의의 경쟁 상대다. 혼자 뛰는 것보다 번갈아가며 뛰는 게 좀 편하긴 하다. 다만, 주전은 내가 했으면 좋겠다. (웃음)

골리 중에 롤 모델은?

엄: NHL에 많다. 올 시즌에 차이나 샥스에서 뛴 웨이드 골리도 배울 점이 정말 많은 골리다.

앞서 얘기했지만 화려해 보이는 탓에 팬도 많겠다

: 개인적인 팬은 거의 없다. 고양에 이글스라는 팀에서 코치를 맡고 있는데 고양에서 경기를 하면 항상 오셔서 응원해주신다. 하이원 팬은 김희우 감독님 시절부터 죽 내려오신 분들이 많아서 열성적이고 그런 소녀팬 이미지보다는 어른스러운 분위기다.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하이원을 아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신다. 케이크도 만들어다 주시고 선수들에게 일일이 카드를 써주시기도 한다. 우리 라커룸에도 보면 '하이원 파이팅'이라고 적힌 피켓이 있는데 그 피켓 뒤에는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전부 짧게 편지를 써주셨다. 특정 선수만 응원하기보다는 팀 전체를 아껴주시는 분위기다. 진짜 고마운 분들이다. 

잘하든 못하든 응원해주시니까 고맙다. 그분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크레인스한테 이겨야겠다.

대화 내내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그냥 괜찮았어요."였다. 올 시즌 성적이 나쁜 것도 다 흘러가는 바람이려니 한단다. 유하게 생긴 인상과 성격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너무나도 이기기 힘든 크레인스와의 대전에서 바라는 것은 기적이지만,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담담하지만 강직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기적을 만드는 벽이 그 자신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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