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1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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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웃 돌아보기 (1)

기사입력 2005.04.25 02:42 / 기사수정 2005.04.25 02:42

김주우 기자


90년대 초중반의 연이은 스카웃 실패는 OB팬들에게는 무척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동수부터 이병규까지 매 시즌 개막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LG의 신인들이 아마시절의 지명도에 걸맞는 활약으로 팀의 간판으로 성장했던데 비해 당시로써는 누구도 납득하기 힘들었던 복권지명으로 몇 년간의 농사를 망친 OB 스카웃은 주사위마저 못굴려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대표적인 케이스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카지노 전문가의 특별과외까지 받고도 두번 굴려 2점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ex) 1,2,3...)


[케이스1]
93년 2차 1라운드 당초 사이드암 박충식을 지명할 것이라는 언론의 예상을 깨고 동국대 우투수 박상근 지명.당시 박충식은 성영재와 더불어 대학 최고의 사이드암으로 주가를 날리고 있었던 반면 박상근은 심각한 컨트롤 부재로 인해 145km를 넘나드는 구속에도 불구,큰 주목을 받지 못했음.

[케이스2]
94년 유지현의 어깨부상을 이유로 좌투수 유택현 지명.유택현의 대학 4년간 기록은 4경기 등판 0승 4패 방어율 5.90으로 사실상 프로진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당시 양승호 스카우트는 대학 진학 후 어깨를 전혀 혹사하지 않은 점과 유택현의 많은 삼진수를 (29이닝 28삼진) 높게 평가,1차지명 낙점.

[케이스3]
95년 진필중 2차 2라운드 픽. 진필중은 대학 4년간 0승 3패 기록.( 93년 0승1패 방어율 13.50 94년 0승2패 방어율 4.50)

대표적인 세 케이스만 이야기 해봤지만 고졸 선수가 드래프트에 나오지 않았던 당시로써는 쉽게 보기 힘든 도박성 지명들이 상당히 많았다. (95년까지 연고지역의 고교생은 계약만 하면 입단했다.) 진필중 같은 경우 신인시즌 후반기부터 맹활약해 주었지만 즉시 전력이 절실했던 팀에게 1차 지명의 연속된 실패와 당시에는 다소 막연해 보였던 장래성 위주의 지명은 팀의 선수불황으로 이어졌고 94년 3인방으로  대표되는 LG에게 90년대 패권을 넘겨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를 돌이켜볼때 OB스카웃은 팀의 전력이 급격히 기울어지던 시점에도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신들만의 뚜렷한 주관을 고수했고 그 노력은 점차 시간이 흘러감과 함께 나름의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그들이 세간의 비웃음을 사가며 지켜왔던 주관이 '고교유망주의 프로직행=>2군행'이 공식화된 지금은 스카우팅의 일반적인 기준이 되었고 90년대 후반에는 오히려 다른 구단에 비해 한발 앞서 간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2004년 기준으로 키 170Cm대 초반의 어깨 약한 유격수와 140Km대의 좌완투수,부상경력있는 사이드암과 145Km대의 정통파 투수가 있다면 팬들이나 스카우트나 누구를 선택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하지만 당시는 거금을 받고 들어온 선수가 개막 엔트리에 없으면 도망간거 아니냐고 따질만큼 모든 팀의 선수층에 여유가 없었으며 그런 와중에도 즉시 전력 외의 2년차 방출이 성행했던 만큼 모험적 스카우팅이 꽃을 피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할만한 장기적인 플랜도 없었다.) 결국 고졸선수의 프로입단이 보편화된 시점에서야 스카우팅의 패러다임은 자연스레 변화하게 된 것이다.


2부에서 계속...



김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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