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1.09 09:23 / 기사수정 2009.01.09 09:23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원년 프로야구 선수들의 근황을 알아보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은 야구역사라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그라운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생 제 2막’을 사는 야구선배들의 존재는 그라운드에서 배운 ‘근성’을 바탕으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야인시대’를 기획하면서 맨 먼저 만난 인호봉 선수(전 삼미)도 유리업계라는 곳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했듯 아들도 열심히, 후회없이 야구하기를 응원하는 소박한 모습도 확인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야인시대 2편’에서 만난 원년맴버는 조금 색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前 MBC 청룡 차준섭 선수가 그러했는데, 그는 성공회 신부로써 인생 제 2막을 시작했다. 야구계를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직자가 된 차준섭 선수는 인터뷰 내내 학원스포츠를 비롯하여 프로 원년시절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말에서는 야구인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이 묻어나 있었다.
프로 원년에 대한 추억
Q : 차준섭 선수는 MBC에서 이길환 선수(작고)와 더불어서 ‘언더핸드 투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원년시절에 중간계투로써 그렇게 나쁜 성적을 냈던 것은 아니었어요(당시 3승 1패, 방어율 4.84).
차준섭(이하 ‘차’로 표기) : 저는 정말로 야구가 좋아서, 순수하게 취미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대학시절에도 야구로 본업을 삼겠다는 생각을 못 했었죠. 당시 장효조(전 삼성)같이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아, 저 친구들은 정말 밥 먹고 야구만 하나보네. 내가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할 바에는 잘 하자’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나와서도 실업야구(롯데)를 할 수 있었죠. 그러다 1982년에 MBC에 입단했는데, 솔직히 첫 승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제가 원년에 3승을 했지만, 그때는 개인 기록보다 팀이 이기면 ‘아, 이겨서 정말 좋다’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야구를 좋아는 했지만, 그 열정이 모자랐기 때문에 일찍 은퇴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 창단맴버였던 백인천 감독께서는 타자로써 베이스에 진루하면 그때부터는 감독으로써 선수들에게 작전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광경이 미국에서도 그다지 흔한 것은 아닌데....
차 : ‘감독 겸 선수’를 하신다는 것에 저 역시 많이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인천 감독님은 프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또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 정말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감독으로써나 선수로써나 최선을 다 하신 분이셨죠. 한국 프로야구의 큰 획을 그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백인천 감독님께서 강조하신 ‘프로정신’을 우리 선수들이 많이 못 따라갔었죠. 몸 관리 철저, 분업화에 대한 인식 등 많은 점에 있어서 미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Q : 실업 롯데시절에는 최동원 선수(현 한화 2군 감독)와도 한솥밥을 드셨어요.
차 : 네 그렇습니다. 제가 군 전역 이후 1981년도에 실업 롯데에서 몸담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최동원 선수는 정말 잘 던지는 투수였습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때 미국에 갔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부분은 동료로써 다소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아마 그때 (미국에) 갔으면 성공했을 것입니다.
Q : 이 외에 생각나는 동료들이 있다면요?
차 : 유종겸(투수), 차동열(투수), 유승안(포수), 최정기(포수), 김용운(포수, 이상 MBC 원년맴버)등이 저와 동년배입니다. 특히, 유종겸 투수와 매우 절친했죠. 지금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저하고 갈 길이 달랐기에 지면상으로만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입니다.
▲ 차준섭 선수는 인터뷰 내내 ‘열정적인 야구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퇴, 그리고 성직자로써의 길
Q : 야구선수로써 살아오셨기 때문에 야구 이외의 다른 일은 생각도 못 하셨을 것 같아요. 운동선수였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되어 생소하고 적응하기 어렵지 않으셨나요?
차 : 고질적인 무릎부상 때문에 스스로도 선수생활을 얼마 못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운드에 있었던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이 더 많았죠. 당시 마음고생이 심해서 안타까운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걷는 것 빼고는 무리해서 운동을 하지 못합니다. 언제 방출통보를 받을 지 몰라 고심했는데, 구단에서는 나가라는 소리를 안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문제는 무릎부상에 대한 원인이 뭔지 몰랐다는 거예요. 결국 인대마저 얇아졌죠. 동계 훈련을 거의 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 3년차 부터는 은퇴를 서서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은퇴 이후 할 것이 마땅치 않아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조직 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구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Q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습니까?
차 : 원래 제가 성공회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무릎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기도를 해 주셨던 분들이 계셨죠. 그것이 아마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신앙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 때문에 저에게 성직자의 길을 권유하신 분이 계셨죠. 그러다가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던 도중 1990년도에 백인천 감독님께서 LG감독으로 부임하시면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연락도 없이 사냐”고 말씀하시면서 “LG 프런트 부장을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하신거죠. 저 외에도 MBC 시절의 동기들도 코치로써 많이 와 있었습니다.
Q :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해 주십시오.
차 : 저는 그런데 둘 다 하고 싶었어요. 선교사가 되고도 싶었고, 또 LG에서 일하고자 하는 욕심도 강했죠. 한 3일 밤을 세면서 고민했을 겁니다(웃음). 그런데 고민하고 있는 저에게 제 아내가 “(LG로) 가고 싶으면 가라”고 얘기했는데, 막상 아내가 가라고 하니까 갑자기 현장으로 가는 것이 그렇게 썩 내키지는 않더라구요. 그리고 또 그 일을 그만두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게 되었구요.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 더 큰 비중을 두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LG 프런트 부장님께 전화로 고사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후로 야구계와는 이렇다 할 소식 없이 지내다가 허구연 해설위원, 이만수 코치 등을 만나 성직자 되었다는 안부를 전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코치는 자신도 꿈이 선교사라며 내심 저를 부러워하더군요(웃음). 허구연 해설위원도 내심 놀라는 듯 하셨구요.
이후 1991년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안했던 공부를 하려니 정말 힘들더군요. 야구만 힘든게 아니예요. 성직자의 길도 고행길이거든요(웃음). 그나마 제가 늦은 나이에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교시절에 은사님께서 한문공부를 시켜주신 데에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규칙에 한자가 많아서 하루에 야구규칙을 몇 번이나 쓰게 하셨거든요. 어쨌든 제가 휘문고등학교에 재학했을 때에는 정규수업을 모두 다 하고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은사님을 정말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을 통하여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거든요.
학원스포츠, 그리고 감독과 코치의 역할
Q : 작금의 학원스포츠 실태를 보시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차 : 그렇습니다. 학원스포츠가 운동을 그만두면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사회 적응적인 문제거든요.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 아들 중에 축구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주위에서 “박지성 뺨치게 잘 한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운동을 해 봤던 사람이기에 “하다못해 영어라도 가르쳐라. 적어도 나중에 선수생활 그만두고 해외에서 코치연수라도 받으려면 지금부터 해야한다”고 조언했죠. 운동 아니면 안 된다는 프로 지상주의를 빨리 뿌리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일본 고교야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던 것 처럼 우리나라도 ‘반드시 운동이 아니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선수들에게 열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슬하의 자녀들(1남 1녀)이 제 아내를 닮아 운동신경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웃음).
Q : 개인적으로 차준섭 선수와 같이 인생 제 2라운드에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 보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차 : 저는 야구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야구선수로써 생활했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과거 선배들에 대한 발자취를 후배 선수들에게 KBO차원에서 소개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을 보십시오. 은퇴 이후 지역 어린이들에게 무보수로 야구를 가르치는 덕망 높은 선수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에 대한 소개는 결국 학원스포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선수로써 부진했다는 것이 인생의 실패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야구인들이 증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 역시 야구로 감독/코치를 한 선배들이나 동료들보다 은퇴 후 사회생활을 하는 선배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저는 야인으로 생활하면서 묻혀져 있는 원년 선수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프로야구도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LG 2군 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했던 이야기가 바로 ‘에디슨도 1개의 물건을 발명할 때까지 700번의 실패를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즉, 야구를 못 하면 실패자로 보는 시각은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 그렇다면 감독/코칭스태프들의 역할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 : 잘 하는 선수를 데려다 쓰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야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따라서 잘 하는 30%의 선수들보다는 아마시절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70%의 선수들 중에서 잘 하는 선수를 ‘키워내는 것’이 감독/코치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재활공장장’ 이라고 불리우는 김인식 한화 감독님께서 명장이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가르침’을 주는 감독과 코치가 있어야 합니다.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감독이자 코치입니다. 선수를 길러내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구단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선수들에 투자하면 그 결실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또한 지도자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은퇴한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코치연수를 떠나는 것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Q : 이렇게 야구에 대해 큰 열정을 가지고 계신데, 90년도에 LG로 복귀하지 않으신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십니까?
차 : (고개를 가로 저으며) 후회는 절대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고, 또 제 앞을 보고 고사의 뜻을 표했기에 후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선수생활을 일찍 끝냈다는 데에 따른 아쉬운 점도 없었습니다. 할 만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많습니다. 올림픽 금메달과 같이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정말 자랑스럽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야구했던 사람으로써 부끄러워 하기도 했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사는 지금 일에 큰 만족을 느끼며 삽니다.
Q : 원년맴버로써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해 주십시오.
차 : 지금 선수들은 옛날보다 좋은 조건에서 야구하기 때문에 충실히 노력하기만 하면 됩니다. 땀의 결실은 절대 속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 하는 후배들이 되어 주기를 기원합니다. 이왕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끝까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선수생활을 이어가십시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나는 실패자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높은 꿈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승부욕 보다는 야구를 즐길 줄 아는 선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선수들은 그 종교가 무엇이건 간에 신앙심을 바탕으로 야구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차준섭은 누구?
1982년, MBC 청룡의 개막전 선발 투수였던 이길환(작고. 전 LG트윈스 투수코치)과 더불어 ‘MBC 사이드암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투수다. 휘문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실업팀 롯데에 입단하여 최동원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프로통산 성적은 방어율 6.07, 3승 1패를 기록했다.
프로무대에 뛰어든 이후 1985년까지 무릎부상으로 이렇다 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듬해 은퇴했다. 이후 개인사업, 직장생활 등 인생의 제 2라운드를 시작하다가 1991년 성공회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사제서품을 받았다. 현재 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성공회 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성직자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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