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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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프로야구] 최고의 옆구리 투수, 박충식 (2)

기사입력 2005.02.21 09:31 / 기사수정 2005.02.21 09:31

김광수 기자


무너진 삼성 마운드의 희망


93년의 영광과 달리 94년은 삼성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즌일 것이다. 처음으로 5위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쥐면서 가을잔치에 초대되지 못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93년 주축이 된 김성래, 강기웅 선수 등 노장 선수들이 줄줄히 부상으로 낙마한게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박충식 만큼은 마운드에서 성준 선수와 함께 팀내 최다인 14승을 거두며 대단한 활약을 한다. 김상엽 선수가 단 2승에 그치면서 그가 에이스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특히 그는 13완투에 3완봉승을 거두며 무려 203이닝을 던지는 철완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이닝수에도 불구하고 2.34에 불과한 방어율은 그를 정상급 투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95년에는 방위 복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19경기 9승 6패 방어율 3.16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너진 마운드는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상엽 선수가 부활하기는 했지만 대체 투수가 부족했다. 기대를 걸었던 최한경, 김인철, 곽채진, 안윤호 등의 선수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삼성은 김상엽, 박충식, 김태한으로만 야구한다는 악평까지 쏟아질 정도였다. 결국 95년 역시 삼성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 연속 5위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백인천 감독이 취임한 96년. 마운드 보강이 절실했던 삼성은 전병호, 최재호, 박태순, 최창양, 김헌수 선수 등 투수를 영입하는데만 무려 15억이 넘는 돈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당시 계약한 선수 중 아직까지 활약하고 있는 선수가 전병호 선수 한 명이라는 점으로 볼 때 이 스카웃은 실패로 보는 편이 맞다. 

한편 팀의 리빌딩 작업을 진행중이던 백인천 감독은 기존의 주전 선수들을 배제하고 김한수, 김태균,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 박석진 선수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삼성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96년이었지만 성적은 오히려 94, 95년보다 안 좋은 6위에 그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박충식 선수는 부상으로 부진한 김태한, 김상엽 선수를 대신해 삼성 마운드의 중심축으로 활약한다. 

방위 복무중이었지만 선발-중간-마무리 할 것 없이 전천후로 등판 29경기 8승 2패 12세이브 방어율 2.01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출전이 가능했던 경기가 홈경기 63경기 인점을 감안하면 홈경기 때 두 경기 중 한 번 꼴로 등판한 셈이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삼성은 6위 자리마저도 위협받았을지 모른다.


 

에이스 본색, 그러나 부진으로 트레이드 되다


97년 삼성은 다시 백인천 감독의 지휘 아래 대단한 타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중거리 타자에서 장거리 타자로 변신해 홈런왕을 차지한 이승엽 선수의 등장은 명가재건에 탄력을 받는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기동력이 신동주, 최익성 선수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출장하던 김한수, 김태균, 정경배 선수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선에서의 리빌딩에 성공했지만 투타는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물론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합류한 박충식 선수는 그 해 역시 13승의 성적을 거두면서 삼성 마운드의 희망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선발 투수였던 박충식 선수와 김상엽 선수만 두 자리 승수를 거두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무리에서 김태한 선수가 활약하기는 했지만 이 때도 마운드에서는 세 선수로 야구한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웠다.


우즈 선수와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 대결로 열광했던 98년에도 그는 11승 10패라는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후 그는 99년 부상으로 단 3경기에만 출장했다. 2000년에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다. 

이때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은 2001년 김응용 감독의 영입으로 보다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한다. 당시 약했던 베터리와 에이스급 투수의 보강을 위해 김동수, 이강철 을 영입한 것이다. 물론 10년 넘게 삼성 마운드의 에이스로 추앙받던 김상엽 선수 역시 보호 선수에서 제외되는 마당에 2년간 부진에 시달리던 박충식을 보상선수 명단에 넣어줄 삼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90년대를 대표하는 두 투수를 LG와 기아가 그냥 둘 리 없었다. 결국 박충식 선수는 이강철 선수의 보호 선수로 기아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가 광주팬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그를 지명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상엽, 박충식 선수와 함께 90년대 삼성 마운드의 핵이었던 김태한 선수 역시 2002년 SK로 트레이드된다. 결국 라이온즈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 선수는 원 소속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 프로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마지막 불꽃, 그리고 은퇴


기아 유니폼을 입은 그는 절치부심하여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주로 중간계투로 나오며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의 녹록치 않은 기량을 보여준다. 부상으로 2년간이나 신음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의 명가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투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불꽃을 피우며 다시 자리를 잡는가 했던 그는 2003년 팔꿈치 부상으로 전반기 단 한 차례도 1군 엔트리에 들지 못하는 결국 은퇴를 결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만다.


현재 그는 모든 생활을 접고 아내가 공부하고 있는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야구교실을 여는 등 아직도 야구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당분간은 호주에서 생활하지만 본인은 야구인인 만큼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야구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호주 생활을 빨리 정리하고 그가 코치로서 국내 프로야구에서 활약할 날을 기대해 본다.



사진출처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
                1995년 삼성라이온즈 팬북 사진 스캔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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