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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인사이드] 한국피겨에는 '최지은'도 있었다

기사입력 2008.08.03 01:08 / 기사수정 2008.08.03 01:08

조영준 기자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한국 피겨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바로 김연아(18, 군포 수리고)입니다. 그러나 김연아만이 한국 피겨의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선수가 최상의 연기를 펼치고자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며 김연아와 함께 같은 시대를 걸어가면서 온 힘을 쏟은 선수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지은(20, 고려대)은 어린 시절부터 김연아와 함께 경쟁하면서 성장한 선수입니다. 그러나 현재 김연아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선수인데 반해 최지은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상만 없었더라면 김연아와 함께 세계무대에서 경쟁했을 빛나는 재능을 가진 최지은은 아쉽게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지은은 결코 '비운의 스케이터'가 아닌 '행복한 스케이터'로서 남아있었습니다.

대전의 산에서 바라본 아이스 링크장, 최지은의 인생을 결정짓다

최지은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초등학교 4학년 겨울에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신었습니다. 등산을 하던 도중, 산 밑에서 바라본 여러 가지 작고 예쁜 건물 중에 유독 어린 최지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이 실내아이스링크라는 것을 확인한 최지은은 곧바로 산에서 내려와 링크장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섰을 때, 놀랍게도 최지은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곧잘 타기 시작했습니다.자신에게 감추어져 있었던 빛나는 재능을 확인한 순간, 스케이트는 최지은의 일부가 되었고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인생으로 변해갔습니다.

대전 출신인 최지은은 본격적인 선수로 성장하고자 홀로 서울에 상경하면서 당시 어린 김연아를 지도하고 있던 신혜숙 코치를 만나게 됩니다. 최지은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확인한 신 코치는 체계적인 기본기를 최지은에게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연아도 배우는 속도가 빨랐지만, 최지은의 습득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에 상경해서 선배 선수의 집에 머물렀던 최지은은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을 이기려고 연습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연습벌레’로 불린 최지은은 기량이 급성장해 갔고 피겨를 시작한지 단 4년 만에 트리플 점프 5종 세트(살코, 토룹, 룹, 플립, 러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국내선수들 가운데 러츠까지 점프를 뛰었던 선수는 최지은과 김연아, 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캐롤라인 장이 선보인 '펄 스핀(Pearl Spin : 허리를 뒤로 깊숙이 뒤로 눕힌 채, 스케이트 날을 잡고 회전하는 스핀)은 신혜숙 코치의 조련으로 본인이 먼저 시도했던 기술이라고 최지은은 밝혔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배운 기술은 결국, 부상으로 국제대회에서 선보이지 못하고 다른 선수를 통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 신 코치와 최지은은 이 스핀의 명칭을 '지은 스핀'으로 지으려고 했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두 라이벌들의 명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최지은도 ‘혹독한 성장기’를 치렀습니다. 사춘기가 몰려오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과 중학교 초기 시절, 최지은은 힘든 피겨선수 생활에 점차 불만이 쌓여갔고 이것은 선수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최지은은 "사춘기 시절은 물론, 지금도 선수생활에 대한 회의가 있을 때가 많다. 다른 모든 삶을 포기한 내 인생에 대해 후회가 들 적이 많았고, 그 시절에는 내가 좋아서 훈련장으로 가던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어떨 때는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링크장에 들어선 적도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최지은의 기량은 날로 향상되었으며 참가하는 대회마다 김연아와 함께 1, 2위를 다퉜습니다. 김연아에 이어 2위에 머물렀던 대회가 많았던 최지은은 ‘만년 2인자’란 명칭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날로 향상해 가던 최지은은 재능이 빛을 보기도 전에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당한 오른쪽 고관절 부상으로 한동안 아이스링크를 떠나야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상에 대한 후유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최지은은 지금도 오른쪽 다리를 90도 이상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겨선수로 볼 때, 큰 마이너스인 몸 상태를 가지고 있는 최지은은 몸을 다시 추슬러서 대회에 참가해봤지만, 번번이 고관절의 통증이 재발하고 허리디스크 부상까지 겹쳐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최지은이 지금까지 가장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최지은은 "토리노올림픽이 있을 시점에 나는 부상으로 너무 힘겨워하던 때였었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꼭 올림픽에 출전하라며 성원을 보내줬지만, 너무나 심했던 부상 때문에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내에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던 선수는 나와 연아 뿐이었다. 그러나 연아는 당시 올림픽에 참가하기엔 나이가 어려서 출전하지 못했고 오로지 나만이 한국의 대표로 참가할 수 있었지만, 기대에 부응을 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아쉬웠지만 많은 이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던 것도 정말 힘들었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올림픽 출전에 대한 아쉬움을 2007년에 있었던 중국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만회하려고 최지은은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최지은의 발목을 잡는 부상의 악몽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으며 동계아시안게임을 앞둔 시점에 최지은은 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최지은은 “기권을 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출전을 하면 최소한 내가 경기를 했다는 의미는 남게 된다. 그것이 꼴찌를 하더라도 기권보다는 훨씬 값진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치며 스케이트를 다시 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최지은은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픈 상황이었습니다. 시합 일주일 전만 해도 양말도 제대로 신을 수가 없었고 스스로 옷조차 입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마취제를 맞고 참가한 세계선수권 때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만신창이인 몸을 가지고 최지은은 쇼트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처음엔 밝은 미소로 관중의 박수에 답했지만 경기 중에 온몸에서 쏟아지는 통증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점프를 뛰고 스핀을 돌며 연기하던 최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아내려고 해도 혹독한 고문처럼 찾아오는 통증을 더 이상 이겨내기 힘들었습니다.

피겨선수는 아무리 아프더라도 관객들에게 어두운 표정을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원칙은 최지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끝까지 연기를 마칠 거라 거듭 다짐했던 최지은은 끝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쇼트프로그램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경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울어봤던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다던 최지은은 남은 롱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끝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만신창이인 몸을 이끌고 철인 같은 투혼을 펼쳤던 최지은에게 돌아온 것은 냉담했던 언론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최지은, 부상으로 무너지다'라는 투로 실린 기사들을 보면서 최지은은 또다시 육체적인 상처가 아닌, 심적인 상처까지 받아야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들을 스스로 이겨내면서 최지은은 한층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지금까지 결코 남에게 의지해본 적이 없다고 밝힌 최지은은 "어려서부터 홀로 서울에 상경해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하면서 생활해 왔던 터라 혼자서도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아픈 곳이 있으면 혼자서 병원을 찾았었다. 어머니들이 선수들을 따라다니며 관리해주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혼자서 해왔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많은 것이 아쉬웠지만 이제는 만족하면서 새로운 인생도 설계하고 있다

최지은은 필자에게 "부상만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큰 꿈을 이뤘을 것이고 세계무대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칠 수 있었을 것 같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비록 늦게 시작한 피겨였지만 4년 안에 트리플 5종 세트를 모두 익혔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점입니다. 그리고 유연성과 표현력도 뛰어났었던 최지은이었습니다. 한국 시니어 무대를 대표하고 있는 김연아와 최지은, 그리고 김나영(18, 연수여고)등은 모두 부상으로 혹독한 선수생활을 치러야 했습니다.

일본의 아사다 마오와 나카노 유카리, 그리고 안도 미키등과 함께 좋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수 있었던 한국의 몇 명의 인재들은 큰 부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 당사자인 최지은은 "한국의 피겨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점이 큰 문제다. 연습이 이루어지는 빙질도 좋지 못하고 전문 링크장도 없어서 성장 중인 어린 선수들이 충분한 수면도 취하지 못한 채,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 훈련에 임하고 있다. 이러면 부상발생의 위험도 높아질뿐더러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현 피겨국가대표에 대한 지원책에도 아쉬움을 표명했습니다. "국가대표선수들이 얻는 것은 태릉링크의 사용과 한달에 대표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일정한 금액이 있다. 그러나 이 금액도  비시즌기에는 지급되지 않고 훈련이 있을 때에만 지급된다. 피겨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종목인데 국가대표선수가 그 비용으로 모든 것을 충당하기엔 너무나 힘들다. 적어도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대표선수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진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어린시절의 라이벌이었던 김연아는 이제 곧 같은 대학에 입학해 최지은의 후배가 될 예정에 있습니다. 김연아와 유독 인연이 깊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최지은은 "연아와의 인연은 확실히 깊은 것 같다. 어릴 적의 연아는 내성적이며 낯을 많이 가렸던 성격이었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활발해졌고 지금은 말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연아는 성격이 굉장히 강한 편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아사다 마오는 연아와 붙을 때에 항상 기에서 눌리면서 실수도 자주 하는 편이다. 털털한 성격에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연아의 큰 장점"이라고 김연아를 평가했습니다.

또한 "연아는 성격이 굉장히 쿨하다. 그리고 함께 대화해보면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진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으며 빵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빵순이'다" 라고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최지은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대회는 2006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대회였습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13위에 그쳤던 최지은은 다음날에 벌어진 롱프로그램에서 트리플 룹, 트리플, 토룹, 트리플 살코 등을 모두 성공시키며 최상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전날 잘했던 선수들이 모두 실수를 연발하면서 13위였던 최지은은 3위권까지 진입했고 최종 결과가 그대로 이어지자 펄쩍펄쩍 뛰면서 너무나 기뻐했던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습니다.

점프를 배울 적에는 너무나 힘들지만 회전수를 다 채운 뒤, 상쾌하게 랜딩했을 때의 그 쾌감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힌 최지은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사샤 코헨을 지목했습니다.

"사샤 코헨도 좋아하지만 점프에 있어서만큼은 연아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깨끗하고 멋진 점프는 정말 드물다."라며 한 때 자신의 라이벌에 대한 칭찬을 끝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상만 없었더라면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최지은은 이제 피겨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연륜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피겨를 경쟁이 아닌,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즐기고 싶다. 그리고 선수생활은 길어야 2년에서 3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도 그 기간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큰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선수로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선수 이후의 삶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필자가 20살의 나이에 비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성숙해서 선수가 아닌 코치와 대화한다는 기분이 든다고 밝히자 최지은은 웃으면서 "내가 선수시절에 못 이룬 꿈을 지도자로서 이루고 싶은 꿈은 물론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링크장에 가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동안 운동만 하면서 잃어버렸던 삶이 너무나 많았다. 피겨도 소중하지만 다른 다양한 삶들을 체험해 보고 싶다. 우선 외국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코치를 생각해서라도 영어공부에 힘쓸 것이며 여행도 많이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피겨에 대한 인생을 살았다면 은퇴 후에는 보다 다양한 삶도 살아보고 싶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최지은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나를 차로 훈련장까지 태워다 준 팬도 있었는데 모든 팬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나는 피겨 선수일 뿐, 팬들에게 직접적으로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나에게 성원을 보내주고 선물과 편지까지 보내주는 팬들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안나온다."라고 끝인사를 마쳤습니다.

최지은은 선수생활의 마지막 마무리를 후회 없이 남기기 위해 올해 랭킹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내년에 있을 2009 하얼빈동계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을 선수로서의 최종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그저 '피겨선수 최지은이 있었다'라고 팬들에게 남는 것이 아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 최지은'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는 그녀는 2000년대 이후로 한국 피겨가 낳은 또 하나의 인재였습니다.


[사진 = 최지은 미니홈피(본인의 허락 하에 사진 기재)]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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