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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인터뷰] 곽경근 감독, ’부천 전성기’를 이끈 공격수 ①

기사입력 2007.05.31 00:37 / 기사수정 2007.05.31 00:37

이상규 기자

[엑스포츠뉴스=이상규, 이우람 기자]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후반.

부천(현 제주 유나이티드)에 축구단에 걸출한 공격수가 등장했다. 그는 K리그 첫해 1998년 30경기에 출전하여 9골 2도움을 기록하더니, 2000년까지 3년간 31골을 넣는 눈부신 활약으로 '니포축구' 부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바로 현 여의도고 감독 곽경근(35)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출신으로  그는 대형 공격수로서 90년대 후반 K리그의 첫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주인공 중 한명이다.

그는 부상만 없었더라면,  K리그에서 좀 더 오랫동안 자신의 실력을 보였을테다. 그러나 그는 2004시즌을 마치고, 스스로 후회 없이 그라운드에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이제 그는 밝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지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 곽경근 감독(35)은 지난 2005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여의도고 축구부 사령탑을 맡고 있다. 여의도고는 차범근 축구교실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특별한 팀이다.

엑스포츠뉴스에서는 2회에 걸쳐 지난날 파란만장했던 '곽경근 선수'의 이야기와 앞으로는 지도자로서 축구와 함께할  '감독 곽경근'의 이야기를 [예.스(예비스타. Yes) 인터뷰]를 통해 연재한다. 

여의도고 감독이 되기까지

"우연이었다. 은퇴해 쉬려고 미국 유학을 가려던 차에, 이임생(수원) 코치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부천에 차범근 축구교실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집사람 역시 경험 삼아 해보라고 해 그렇게 첫 발을 딛게 됐다. 부천 담당하다가 서울 담당도 하고, 한 달 뒤 여의도고 자리가 비었는데 코치가 아닌 감독으로 가게 되었다."

곽경근 감독과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맨 먼저 곽경근 감독의 근황을 물어봤다. 2004시즌이 끝난 뒤 워낙 소리없이 은퇴했기 때문.  그는 자신을 "여의도고 감독 곽경근"으로 소개했다.

여의도고는 한국 축구계에 있어 특별한 곳이다. 차범근 수원 감독이 창단에 힘을 보태 2001년 축구부를 탄생시켰고 창단식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KFA) 회장이 참석했을 정도다.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배출된 유망주들은 '신용산 초등학교-용강중-여의도고-수원대'에 이르기까지 축구와 학업을 함께 병행한다.

여의도고는 다른 학교와 달리 선수는 정상적으로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흔한 합숙도 없다. 그 대신 선수로서  활동할 더 나은 여건을 보장한다.  곽경근 감독은 한국 고교 축구계의 선진적인 곳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곽 감독과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가장 궁금한 내용을 꺼냈다. 그는 왜 조용하게 은퇴를 했을까? 그 배경은 전혀 뜻 밖이었다.

"후회는 없다. 체력 문제가 아니라, 눈이 안 좋았을 뿐이다. 햇빛을 보면 흰자에서 검은 눈동자로 가려지는 현상이 있고 왼쪽 눈을 세 번 수술하니까 안 좋아졌다. 공을 다루고 키핑할 때가 안된다. 계속 헛발질하는 문제점이 있으니 접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사람과 상의해서 은퇴했다."

나는 모 자르다고 생각했다.

곽경근 감독이 선수 시절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부평고 시절이다. 당시 이임생 코치, 노정윤(미국 체류중)과 함께 많은 대회에서 무적 부평고 시대를 구가했다. 당시 부평고는 지금까지도 훌륭한 축구 선수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80년대 말 부평고를 빛낸 '선배' 곽경근 감독은 부평고의 저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딱히 그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부평동중과 만수중에서만 부평고로 진학하다 보니, 선수들의 손발이 잘 맞고, 호흡도 좋더라. 그래서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좋은 선수도 잘 나오더라."

'무적 부평고' 시절을 이끈 당시 곽경근 감독은 한국 축구를 이끌 대형 공격수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부평고 동기 이임생 코치, 노정윤과 함께, '축구 명문' 고려대에도 함께 진학해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려대행이 정해졌다는 사실.

곽 감독은 고교 시절에 대해 "마음가짐은 운동할 때는 운동하고, 쉴 때는 푹 쉬자고 했다. 항상 나는 모 자르다고 생각했다. 청소녇 대표팀에 있어도 뭔가 모 자르다고 생각했고 항상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런 면을 1학년 때, 실력과 함께 인정을 받아 고대행을 미리 결정 지을 수 있었다."

얘기를 나누며, 곽 감독만의 진지한 겸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한창 혈기 왕성한 대학 시절에 묻는 얘기엔 미소를 지으며 이어나갔다.

"그때는 100m를 11초로 돌파할 정도로 스피드가 빨랐다. 정말이지, 경기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풀렸다. 무조건 많이 뛰면 수비수가 지치던데, 계속 치고 다니니까 재미있었다. 체력에 자신 있어 항상 더운 날씨를 즐겼다.

"하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올림픽 본선에서 3무의 성적을 거두고 학교에 돌아온 그 다음날,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그때부터는 속도가 안 나와서 100m 13초 대로 느려졌다. 무릎 제대로 재활 안 하면 스피드가 느렸는데 난 그걸 늦게 알았다. 7년 뒤 부천에서 닥터와 얘기하면서야 알게 됐는데,  그런 수술을 하면 스피드가 줄고 몸이 늘어난다고 한다더라."

고교 시절과 대학 새내기 시절.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뛰었고, 덕분에 1992년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당시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행을 이끌 수 있었다.

곽 감독은 당시의 영광를 나눈 김병수(포항 코치), 노정윤, 서정원, 박철 등과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고 한다. 올림픽 대표팀를 오랜만에 떠올랐다는 그는  특히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과 대한축구협회(KFA)의 적극적인 지원 및 활발한 유럽 전지훈련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곽 감독은 크라머 감독을 "작은 체구에도 카리스마가 있었고 선수들의 경기력을 콕콕 찍어주는데다 꼼꼼하다."라고 말한다. 그 시절 자신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체력, 헤딩, 득점할 때의 집중력에 자신이 있다."라고 밝혀 크라머 감독에게 인정받은 비결을 털어놓기도 했다. (웃음)

이렇듯, 곽 감독은 올림픽호에서의 활약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2년 뒤 1994년 미국 월드컵 출전도 노려볼 만 법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오른쪽 무릎 부상의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1994년도에 국가 대표팀 평가전에 출전하고 그랬는데, 대학교 4학년 때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그래서 당시 대표팀 감독이셨던 김호 선생님이 3개월을 기다려줬는데, 좀처럼 쉽게 회복이 안됐다. 결국, 미국 월드컵 대표팀 최종 명단에서 떨어졌다. 정말이지. 그거 하나는 선수 생활 중에서 가장 아쉬웠다" 며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았다는.

무릎 부상에 속상했다는 곽 감독.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상은 곽 괌독에 대신 다른 기회를 열어줬다. 바로 당시 프로축구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일본 진출이 바로 그것.

"프로를 싫어서 간 게 아니라 무릎 때문에 군대 못 갔다. 그래서 고려대 감독님이(남대식 선생님) 노정윤 선배가 일본에 있는데, 너도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당시에는 91년 황선홍과 홍명보(현 대표팀 코치)를 시작으로 노정윤과 곽경근 감독, 박건하(수원 코치) 등에 이르기까지 몇몇 선수들이 드래프트를 거부한 사례가 있었다. 이에 대해 곽 감독은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유공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드래프트는 자기가 가고 싶은 팀이 있는데 못 가는 단점이 있다. 어려운 구단, 신생팀에 가면 아무래도 힘들지 않았겠는가."

결국, 그는 고려대를 졸업할 즈음에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1995년 일본 J리그 우라와 레즈에 입단했다.

힘들었던 일본 시절

기대를 품고 프로 선수로 첫 발을 해외에서 시작한 곽 감독. 그러나 그는 입단 첫 해는 결코 평탄치 못했다.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이 만만치 않았고, 설상가상 무릎 부상이 도졌다.

"우라와 시절에는 정말 마음고생이 많았다. J리그는 실전보다 연습부터 거칠고 무섭다 보니, 부딪히고 차고…. 적응이 안됐다. 당연히 선수들에게 정이 안 느껴지고 차가웠다." 일본 진출 한 달 만에 후회를 느꼈다는 곽 감독이었다.

힘든 신고식을 치른 곽 감독. 그는 다행히 이듬해 2부리그(JFL) 소속이었던 후쿠시마로 팀을 옮겨 2시즌 동안 32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 히로시마 산프리체 에서 활약하던 노정윤처럼 J리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면 걸출한 해외파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타국 리그에 적응하는 게 예상외로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록 우라와에서 활약한 기간이 짧았지만 당시 J리그는 프로리그로서 급성장을 거듭했다. 곽 감독은 당시의 J리그에 대해 어떤 점을 인상 깊게 느꼈을까? J리그 출신 선수들이 감탄한 것과 비슷한 답변의 내용이 들려왔다.

"일본에서 운동하면 내가 프로선수라서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한국은 빨래하고, 후배가 대신 빨래하고, 공 가지고 다니고 그런다. 그래서 내가 대표팀으로 외국에 가는 걸 싫어했다. 짐은 다 챙기고 음료수와 물을 챙기고 그랬으니까. 물론, 내가 가장 후배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웃음)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 곽경근 감독은 1997년에 다시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해 돌아왔다. 결국, 그는 드래프트에서 당당히 1순위로 평소 가고 싶었던 고향팀 부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자신의 축구 인생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팀인 부천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 많이 잊힌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하게 생각했다. 한국에서 할 때가 되었고 국가대표팀에 들어오고 싶었다. 드래프트 이전에 부천에서 하재훈 선생님이 보자고 했다. 그때 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뽑아 주신다면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니폼니시 감독을 추억하며

역대 K리그 최고의 외국인 지도자로 평가받는 니폼니시 감독과 당시 K리그 새내기였던 곽경근 감독과의 만남은 1998년이었다. 곽경근 감독은 첫 해 30경기에 출전하여 9골 2도움을 올려 니폼니시 감독을 흡족하게 했다. 그 비결을 묻자, 앞에서 얘기해준 대로 "그저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포메이션이 4-4-2였는데 미드필더진이 다이아몬드 형태였다. 투톱은 양쪽을 벌리면서 경기를 했는데 그 선수들이 체력이 안 되고 공격까지 안되니까 나를 활용하게 됐다. 니폼니시 감독이 특별히 주문한 것은 없었다. 내가 좋은 모습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축구 전문가들과 축구팬들은 니폼니시 감독의 축구 스타일인 '니포 축구'를 재미있어 했다. 당시 그라운드에서 부천 선수로 활약했던 곽경근 감독 또한 '니포 축구'를 묻자 다시 웃음을 짓는다. 그때의 좋은 추억은 여전히 그에게 가장 값진 시절이던 것이다.

"(그땐) 기분이 좋았다. 패스 위주로 하다가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고 내가 헤딩하는 경우였는데 이런 게 신선하고 조직적이었다. 우리가 경기를 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잘 안될 때는 잘 되도록 많이 뛰니까 선수 전체가 경기를 잘 풀어갔다."

니폼니시 감독의 수제자로 조윤환 전 전북 감독은 스승을 가리켜 인간적으로 본받을 점이 많은 지도자라고 치켜세운다. 이는 곽경근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 분은 선수에게 부담을 절대 주지 않는다. 너는 뭐가 안 좋다, 너는 이렇게 하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 신사다. 항상 표정이 똑같다. 얘기하면 긍정적으로 말하고 지적을 안 한다.”

니폼니시 감독이 1998년 말에 부천을 떠난 이후, 그의 수제자였던 '조윤환-최윤겸-하재훈' 트리오가 부천 감독직을 맡았다. 그렇다면, 곽경근 감독이 바라본 조윤환 감독(당시 수석코치) 최윤겸 감독(당시 코치) 하재훈 위원(당시 스카우트, 트레이너)의 스타일은 어땠을까?

"거의 스타일이 비슷했다. 조윤환 감독님이 한 것을 최윤겸 감독님으로 이어가고 하재훈 감독님까지 이어졌다. 결론은 패스 위주로 하다가 막판에 요리하는 형식이다. 모두 조직적인 패스를 원했다. 특히 조윤환 선생님이 '니포 축구'를 가미했다. 그때 (이)원식이가 잘했다. 패스 돌리다가 막판에 한방에 역습으로 이어지니까…."

그 당시 곽경근 감독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전술은 내가 공격진에서 가운데를 맡고 전방으로 넘겨주는 역할이었다. 조윤환 감독 시절에 이르러 이원식이랑 이성재가 그래서 골을 많이 넣었고 이성재는 99년도에 신인왕이 됐다. 나는 포스트플레이, 특히 내가 생각해도 헤딩은 정말 잘했지."

"그런데. 헤딩을 계속 하니까 후유증이 생기고 앞이 깜깜해지더라…. 그게 은퇴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김은중 같은 경우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경우지만 나는 두 개의 눈이 합해지면 한 명이 두 명으로 보이니까 초점이 안 좋아진 것이다…."

(히)편에서 이어집니다.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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