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손님’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이야기의 얼개로 가져왔다. 쥐떼가 들끓는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 사내가 피리를 불어 쥐떼를 없앤다는 설정을 그대로 사용한다. 다만 이야기의 무대가 한국전쟁 이후의 외딴 산골마을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구의 민담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 옮겨진 결합은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해 뒤, 떠돌이 악사 우룡(류승룡)과 영남(구승현) 부자는 서울로 가던 길에 우연히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산골 마을 풍곡리에 들어선다. 어딘가 평화로워 보이던 마을은 알고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쥐떼들로 곤란을 겪고 있다. 우룡은 영남이의 폐병을 고칠 목돈을 준다는 촌장(이성민)의 약속을 믿고, 힘겹게 쥐떼를 없앤다. 하지만 우룡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들과의 행복한 서울행이 아니다.
(※ 아래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들이 밝혀져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남겨진 아이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부터 ‘피리 부는 사나이’는 묘하게 슬픈 이야기였다. 특히 ‘다리를 절어’ 동굴 밖에 남겨진 소년 때문에 그랬다. 도시의 모든 아이들이 피리 소리에 홀려 동굴 속으로 사라졌을 때, 소년은 아픈 다리 때문에 친구들을 뒤쫓아 가지 못했고 그 덕분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남겨진 소년이 더욱 불쌍하기만 했다. 소년이 영원히 또래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피리 부는 사나이’에는 두 명의 외톨이가 등장한다. 피리를 부는 유랑 악사와 다리가 불편한 소년. 이들은 ‘이방인’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리에 끼지 못한다. 유랑 악사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소년이 동굴 앞에 남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앙에서 쥐(나쁜 것)와 아이들(좋은 것)이 사라진다. 이상하리만치 정연한 더하기와 빼기.
‘손님’은 이 산수를 뒤튼다. 우룡은 ‘다리가 불편한’ 피리 부는 사나이로, 이방인이면서 장애인이다. ‘손님’은 우룡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우룡이 동굴 앞에 남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앙에서 세계(풍곡리)가 사라진다. 원작 민담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그리워한 어른들의 자리가 ‘손님’에는 없다. 회상할 어른들과 목격자인 소년의 부재. 그래서 ‘손님’은 결말에 이르러 왠지 역사 바깥으로 밀려난다. 우화에 역사적 긴장을 품으려던 서사가 거의 폐쇄공포증을 안겨주면서 끝을 맺는다.
동굴에 갇힌 수인
‘손님’은 동굴을 여러 겹으로 활용한다. 우룡은 쥐떼를 유인해 동굴에 가두고, 최종적으로는 ‘징벌의 밤’에 살아남은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동굴로 향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동굴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있다.
‘손님’의 비극은 나병환자들을 몰살시킨 사건에서 기원한다. 창궐하는 쥐는 이 몰살의 부산물이다. 나병환자와 무녀를 동굴에 가두고 불에 태웠지만 ‘원한과 저주’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쥐떼는 저주의 전령이 되어 ‘마을의 밤’과 그들의 꿈속에 출몰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풍곡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굴이다. 외부로부터 빗장 걸어진 세계. 우룡과 영남이 마을에 들어서게 된 것은 폭우에 ‘마을을 숨기고 있던 문’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힌 풍곡리 사람들과 동굴에 갇힌 쥐. 동굴 안의 동굴. 광장이 없는 밀실의 세계. 우룡이 쥐떼를 없앤 후에 마을 사랑방에 모인 ‘동네 청년들’ 사이에 잠시 광장의 빛이 반짝인다. 하지만 촌장과 아들 남수(이준)는 ‘빨갱이 사냥’ 이라는 거짓말로 그 빛을 단번에 꺼뜨린다.
플라톤의 비유에서 동굴에 갇힌 인간은 동굴 속에 켜진 촛불로 인해 벽에 비추인 그림자를, 즉 실재 세계의 가상을 진리로 여긴다. 풍곡리에서는 촌장(촛불)으로 인해 전쟁 중(그림자)이라는 거짓이 진실로 여겨진다.
레드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무의식속의 ‘감정과 결합된 심적인 내용의 집합’이 통상적인 의식 활동을 방해하는 현상이다. 학교공포증이나 대인공포증처럼 의식적으로 그것이 제어되지 않는 몸의 반응이다. 레드 콤플렉스는 한국사회가 ‘빨갱이’라는 단어 앞에서 얼마나 통상적인 의식 활동을 벗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쥐떼를 몰아내고 약속받은 보상금을 요구하는 우룡이 돌려받는 것은 ‘잘려진 손가락’과 ‘빨갱이’ 혹은 ‘간첩’이라는 누명이다. 그저 상대방을 ‘빨갱이’로 부르는 호명만으로 생사여탈권을 거머쥐는 촌장. 우룡이 마을 사람들과 쌓아온 감정적 교류 역시 단칼에 끊어진다. ‘빨갱이’는 역병이자 쥐이고 죽음의 공포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우룡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제어되지 않는 자동반사적인 몸의 반응. ‘손님’은 레드 콤플렉스의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준다.
마술피리
우룡은 자신의 피리 소리가 ‘귀떼기 달린 짐승은 다 끌어올’ 만큼 매혹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실제로 쥐떼들은 피리 소리에 홀려 동굴에 갇힌다. 원작인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도 이 능력은 마법처럼 묘사된다. ‘손님’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이 피리 소리였다. 전반부의 헐거움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보다도 이게 더 걸렸다.
동물을 홀릴 정도의 피리 소리를 구현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손님’의 피리 소리는 그저 경쾌하다는 느낌만을 줬는데, 이것은 영화가 전체적으로 전달하려는 ‘홀림’에 대한 감각의 측면에서 아쉬웠다. 결국 과연 정말로 홀리는 것은 누구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마술 피리로 쥐떼와 아이들을 홀려낸 우룡보다는, 거짓과 기만으로 주민들을 오랜 세월 홀려낸 촌장이라고 답하는 게 맞다. 좀 더 매혹적인 피리 소리였다면 우룡과 촌장이 경합하는 이런 ‘홀림’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홀림은 우룡이 약장수라는 측면에서도 반복된다. 떠돌이 약장수야말로 모여든 구경꾼들을 재빨리 구워삶는 말재주로 ‘만병통치약’을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사기꾼이 아니던가. 우룡이 만나는 사람마다 찔러 넣어주는 양담배도 어찌 보면 환심을 얻어내는 만병통치약이다. 그럼에도 우룡의 수단은 촌장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힘없는 과부에게 선무당 연기를 시키고, ‘yellow monkey, kiss my ass'라고 써진 메모를 간첩암호라고 우기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다락에 있는 일본순사복 밖에 없는데도, 촌장은 빨갱이라는 만병통치약을 잘도 쓴다.
‘손님’은 기술적인 균형과 노련함보다는 과감한 비유와 강렬한 폭발로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영화다. 감독은 결말에서도 관객이 기대하는 감정적인 한계선을 넘어선다. 단호하게 희망의 지평을 걸어 잠그고, 마치 우리가 여전히 동굴 안에 있다는 묘한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동굴에 갇힌 수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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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