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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왜 우루과이에서 시작됐을까?

기사입력 2006.01.09 11:09 / 기사수정 2006.01.09 11:09

손병하 기자

-역대 월드컵 기행 ①-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지난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 월드컵이란 세계 최고 규모의 스포츠 축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꽤나 가깝고 친숙한 대회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브라질이나 프랑스 같은 정상급 국가의 대결과 한국팀의 경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월드컵이란 대회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월드컵에 대한 인식과 문화가 많이 성장했다.

그런 월드컵이 오는 6월 10일(한국시각) 독일 뮌헨에서 개막해 전 세계의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다시 한 곳으로 모이게 한다. 개최국인 독일을 포함,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과 우승후보로 꼽히는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또, 지난 월드컵의 4강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한국과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는 우크라이나 등 각 대륙에서 출전한 32개 나라는 총성 없는 전쟁과 각본 없는 드라마를 준비하며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나 UN(국제연합)보다도 더 많은 회원국(2006년 1월 현재 205개국)을 보유하고 있는 FIFA(국제축구연맹)가 주최하는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 다가오는 독일 월드컵에 앞서 지나간 월드컵의 역사를 들춰보고 잊을 수 없는 명승부들과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상기하는 것도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제1회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개최 배경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축구는 유럽과 남미를 포함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 무려 22개 국가가 참여하는 인기 종목이었다. 관중의 호응도 폭발적이었고, 무엇보다 전 세계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었다. 하지만,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지향 하는 IOC의 올림픽 정신 때문에 축구에서도 프로 선수들은 출전할 수 없었다. 당시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이미 클럽 축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유럽 국가들은 최고의 선수들을 내보낼 수 없는 올림픽에 불만을 표시했었다.

이에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유럽의 참가국 수가 줄기 시작했고, FIFA는 세계 최고 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대회의 필요성을 느끼며 이른바 축구의 세계선수권 개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앙리 드로네 사무총장은 "프로축구가 뿌리 내린 많은 나라가 그들의 최강 팀을 올림픽에 출전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축구는 올림픽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라고 역설하며 축구와 올림픽의 분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1921년 취임한 FIFA의 3대 회장인 줄리메는 앙리 드로네 사무총장과 함께 FIFA가 주관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1928년 열린 FIFA 총회에서는 2년 뒤인 1930년 첫 번째 축구 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단일 종목으로선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가 탄생한 것이었다.

대회 개최가 결정되자 FIFA는 개최국을 찾아 부심했지만, 당시 세계 축구계의 주류였던 유럽은 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문제로 대회 개최는커녕 참가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후, 미국의 뉴욕 증시 폭락으로 인한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월드컵 개최는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FIFA 회장인 줄리메를 비롯한 FIFA의 적극적인 교섭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등 몇몇 유럽 국가와 남미의 우루과이가 개최 신청을 했었다. FIFA는 역사적인 첫 번째 개최국가를 놓고 고민 했지만, 독립 100주년 이라는 프리미엄을 앞세운 우루과이에 첫 개최의 영광을 안겨주었고, 우루과이는 참가국들의 체재비와 여비 부담까지 흔쾌히 떠안으며 제1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은 이후에도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영국이 머나먼 남미의 소국인 우루과이가 축구 세계 선수권을 개최한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고,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하며 FIFA를 탈퇴 했었다. 이에 나머지 유럽 국가들도 참가를 거부하면서 대회는 반쪽짜리로 처할 위기를 맞았다.

헌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남미 국가들이 유럽의 건방진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며 브라질을 선두로 줄줄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첫 대회를 남미가 개최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유럽이나, 그러한 유럽의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 남미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아직도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며 티격태격하고 있는 유럽과 남미의 축구 자존심 싸움은 이미 첫 월드컵 개최지 선정부터 시작되었었다.

이러한 두 번째 위기에서도 줄리메 회장의 노력이 돋보였다. 줄리메 회장은 월드컵의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유럽 국가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줄리메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프랑스가 가장 먼저 참가를 결정했다. 이어 벨기에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월드컵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첫 빛을 보게 되었다.


▲월드컵 뒷얘기

-왜 개막전을 우루과이가 하지 않았을까?

제1회 월드컵에서의 역사적인 개막전은 아쉽게도 개최국인 우루과이의 몫이 아니었다. 통상 월드컵의 개최국이 개막전을 치루는 것을 상기하면 조금 의아스러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루과이는 개최국임에도 불구하고 왜 대회의 개막전을 하지 않았을까?

대회 개막전이 펼쳐진 7월 13일은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 이었다. 우루과이가 독립 100주년 이라는 프리미엄으로 월드컵의 개최 영광을 안았듯이, 프랑스에게는 대혁명 기념일도 우루과이의 그것 못지않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루과이 축구협회는 무산 위기에 처했던 월드컵을 성사시켜준 줄리메(프랑스) 회장의 예우 차원에서 줄리메의 조국인 프랑스가 역사적인 첫 경기를 역사적인 날에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이러한 우루과이 축구협회의 속 깊은 배려로 프랑스는 월드컵 역사상 첫 경기를 장식하는 영광을 안았다.

-월드컵을 위한 13일간의 긴 여정

막상 출전을 결정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 등의 유럽 국가들에겐 우루과이로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6월 21일 프랑스에 모인 4개국의 대표 선수단은 곤테-베르데호를 타고 기나긴 여정에 들어갔다.

6월 29일 브라질에 도착한 곤테-베르데호는 다시 브라질 대표단을 태운 뒤 4일을 더 항해한 끝에 7월 3일 마침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도착했다. 월드컵이란 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유럽 선수단은 무려 13일간의 긴 여행을 했던 것이었다.

-전반은 아르헨티나, 후반은 우루과이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공인구라는 것이 지정되어 대회 기간에 사용하게 되었었지만, 당시만 해도 공인구는커녕 제대로 된 공의 규격 조차 없었다. 하여 경기에서 사용할 공의 논란이 종종 일어나곤 했었는데, 우루과이 월드컵의 결승전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와의 신경전은 대단했었다.

숙명의 라이벌인 두 국가는 끝까지 자신들이 사용하던 공으로 경기를 치를 것을 주장했고, 결국 전반엔 아르헨티나의 공으로 후반엔 우루과이의 공으로 결승전을 치루기로 합의하였다. 공교롭게도 전반엔 자국의 공을 사용했던 아르헨티나가 2-1로 앞섰고, 후반엔 우루과이가 3-0으로 이기면서 묘한 결과를 연출하게 되었다.

-월드컵 때문에 국교 단절?

센테나리오에서 벌어진 결승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2만여 명의 아르헨티나 원정 응원단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하면서 부터 행진을 벌이며 결승전 경기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었다. 결국, 그들이 경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결승전 때 있었던 공' 논란 때문이었다.

우루과이 영사관까지 가두 행진을 벌이던 시위대에는 일반 시민까지 합세하면서 그 규모가 더 커졌고 그들은 우루과이 영사관의 창문 등을 깨부수는 등 폭력적인 시위로 우루과이 영사관을 위협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일시적인 국교 단절까지 들어가게 되었었다. 첫 대회였지만 우루과이 월드컵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월드컵 트로피는 누가 만들었을까?

FIFA가 1930년에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한 후, 프랑스 조각가인 아베르 사프(Abel LaFleur)는 우승팀에게 시상할 순금 트로피를 제작했다. 승리의 여신이 팔을 뻗쳐 팔각형 컵을 받들고 있는 조각품이었다.

지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브라질의 3회 우승 업적을 기리어 브라질에 영구 수여된 이 트로피는 현재는 월드컵을 위해 헌신했던 줄리메 회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줄리메컵'으로 불리고 있다.

줄리메컵은 수차례 도난과 분실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원본 대신 복제품이 소장되어 있다. 제2차 대전 중 침략군을 피해 이탈리아의 한 가옥의 침대 밑에 숨겨지기도 했고, 1966년 영국 월드컵대회 직전에 도난당하기도 했다. 영국 경시청도 찾지 못한 이 트로피를 찾아낸 것은 "픽클즈" 라 불리는 잡종견이었다. 픽클즈가 교외의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것. 이 트로피는 1983년 브라질에서 다시 도둑을 맞았는데, 이후 행방을 찾지 못한 채, 도둑들이 녹여서 없앴을 것이란 추측만 하고 있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FIFA 줄리메 회장은 확고한 신념과 축구 사랑으로 세계 축구 선수권인 '월드컵'의 꿈을 위해 헌신했고, 그 결과 현재 세계 최고의 축제인 월드컵의 첫 개최를 성공시켰다. 단순한 단일 종목의 세계 대회인 월드컵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사상 최고의 축제로 성장할 줄은 당시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시작한 월드컵은 이제 전 세계가 함께하는 최대의 축제가 되었다.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은 그런 힘들고 어지러운 국제 정세를 이겨내고 첫 발을 때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대회였다.


◆대회 기록

*대회 기간:1930.7.13 ~ 1930.7.30(18일)

*참 가 국 :우루과이(개최국), 아르헨티나, 벨기에,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프랑스, 멕시코, 파라과이, 페루, 루마니아, 미국, 유고슬라비아

*개최 도시:센타나리오 등, 몬테비데오 내 3개 경기장

*총 득 점 :70골, 평균득점 : 3.89골

*총 관 중 :434,500명, 평균관중 : 24,139명

*득 점 왕 : 스타빌레(8골. 아르헨티나)

*결 승 전 : 우루과이 vs 아르헨티나 (4-2, 우루과이 우승)



손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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