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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 잼' 명진스님 "종교인, 세상의 고통과 탄압·불의에 저항해야"[종합]

기사입력 2020.03.23 23:06 / 기사수정 2020.03.24 03:30


[엑스포츠뉴스 김현정 기자] '배철수 잼(Jam)' 명진스님이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3일 방송된 MBC '배철수 잼(Jam)'에는 시대를 대변하는 불교계 대표 '운동권 스님'인 명진 스님이 출연했다. 

배철수는 "나와는 반대편에 있다. 내가 체제 순응형이면 이분은 체제 도전형이다. 난 사회의 불의를 보면 투덜거리지만 참는다. 그런데 이 분은 사춘기 학생 같은 스타일"이라며 명진 스님을 소개했다.

배철수는 승적 박탈 이야기를 꺼내며 스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냐고 물었다. 명진스님은 "스님이라는 말도 안 맞는 게 스승님의 준말이다. 스님들이 자기 얘기를 할 때 '난 명진 스님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나는 명진 스승님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명진입니다 하면 된다. 난 스승이 아닌데 부담스럽다. 명진 씨도 좋고 명진아도 싫지 않다. 명진 형님도 좋다"고 밝혔다.

명진스님은 "남들에게 들려줘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나이와 성별을 떠나 스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도 혐오감을 주거나 사화에 이익이 안 되는 짓을 하거나 개인적인 삶을 살면 형상만 스님이고 내용은 스님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했다.

강원도 대관령에 거주 중이라는 명진 스님은 "내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분이 있어서 단지불회를 통해 100여 명 정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인다"고 근황을 전했다. 수준급 실력으로 스노우 보드를 타는 모습도 공개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스노우보드, 수영 등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성격이 강하다. 혼자 바다로 나가는 게 두렵지 않냐. 도전하면서 희열이 있다. 지난해 서핑도 시작했다. 나이가 70살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바다에서 하는 서핑은 부담스럽더라. 혼자 살면 철딱서니가 없다. 열이 펄펄 나는 자식을 안고 병원 문을 두드려보지 않고는 인생을 얘기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밝혔다.

60년대 말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던 을지로 1가 유명 음악다방 킬리만자로의 DJ로 활동했던 일화를 공개했다. 명진 스님은 "지하에 킬리만자로가 있었다. 자주 가다 보니까 DJ를 보던 형이 자리 비울 때 대타로 했다. 고등학교 때였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유행한 팝송인 톰 존슨의 ‘Delilah(딜라 일라)’, 샘 더 샘 앤 더 파라오스의 'Wooly Bully(울리불리)’ 등을 소개하며 팝 음악 전문 DJ 배철수도 놀랄 만큼의 팝 지식을 뽐냈다. 명진 스님은 "배철수의 '빗물'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저린다. 드라이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 바이브레이션을 아무도 흉내를 못한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방탄소년단의 가사가 요새 어떻게 저런 가사를 지어낼까. 종교가 우리 삶을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냐. 자칫하면 사람을 속이는 것밖에 안 된다. 지옥 간다고 협박해서 돈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게 지금의 종교다. 차라리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힘과 용기를 주는 게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방탄소년단의 아미다. 아미타불의 아미다"라고 말했다.

이어 "'러브 유어 셀프', 나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고민을 갖고 이 노래를 들으면 경전에 나오는 법문 같은 내용이 있다. 최근 '블랙스완'도 발매했더라. 절을 그렇게 많이 다닌다. 방탄소년단이 철학적 사유를 깊이 한다. 소리를 아름답게만 내는 게 아니라 소리 속에 엄청난 삶의 고뇌가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태춘 박은옥의 '떠나가는 배'를 들은 뒤에는 안타까운 사연도 고백했다. "1974년에 동생이 해군에 갔다. 당시에는 큰 사고였던 YTL 침몰 사고로 죽었다.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며 동생을 그리워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도 망하고 초등학교 전학도 6번 다녔다. 중학교는 두 군데다. 고등학교 때까지 9곳을 다녔다. 태어날 때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업을 해서 돈을 잘 벌었던 것 같다. 적산 가옥 같은 곳에서 살고 고급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만 해도 첩을 뒀다. 아버지도 돈 많고 인물 좋고 바람을 피웠던 거다. 어머니가 나와 비슷하게 격하다. 어머니가 수면제를 잔뜩 먹고 돌아가셨다"며 아픈 기억을 언급했다.

이어 "아버지는 막내고 어머니는 3남 1녀 중 장녀였다. 부잣집 장녀가 그렇게 떠난 거다. 외할머니의 분노가 굉장했다. 방학 때 외가에 가면 '기중아 네 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아니?'라고 계속 말하며 한풀이를 했다. 친할머니는 독한 년. 어린 것들이 눈에 밟히는데 어떻게 제 숨을 끊어'라고 했다. 두 개가 같이 들어온 거다.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강 같은 아버지, 산 같은 어머니 이런 개념 없이 홀로 살았다. 분노가 굉장했다.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출가를 한 이유도 밝혔다. 명진 스님은 "1968년 여름방학 때 전라북도 무주에 있는 관음사에 입시 공부를 하러갔다. 하도 서울에서 말썽을 부리니까. 거기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왜 불행한가 궁금했다. 스님이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전생에 네가 지은 죄가 현생에 나타나고 현생에 하는 짓이 다음 생애 내가 받아야 할 업보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더라. 이해가 갔다. 스님이 왜 여기에 와서 입시 준비를 하냐고, 대학은 가서 뭐 할거냐고, 잘 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결국 그렇게 살다가 죽으려고 공부하는 거냐고 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무슨 대학을 가고 그런다고 하냐. 내가 날 찾아가는 길을 공부하는 게 불교다. 그걸 깨달은 사람이 석가모니'라고 하더라. 그 스님이 가고 난 뒤 불경 책을 읽었다. 나의 불행은 끝났다는 생각에 그 길로 출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한 명진 스님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에 대해 "공부도 안 되고 뭘 깨닫는 걸까라는 고민이 있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피해 운동권 학생이 해인사로 숨어들어왔다. 암자에서 얘기를 듣다가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전면에 나서는데 우리는 뭐야 이런 고민이 많았다. 86년에 불교탄압대책위원회를 만들고 해인사 승려대회의 사회를 봤다. 땀 흘려 노동해서 먹고 사는 게 아니지 않냐. 공짜로 밥을 먹으니 갚아야 한다. 그것이 복을 빌어주고 극락 가라고 축원해주는 걸까? 세상의 고통과 탄압, 불의에 저항을 당연히 해야 한다. 그게 종교인의 자세"라며 가치관을 전했다.

이날 배우 안석환이 특별 출연했다. 명진 스님과 10여 년간 인연을 이어왔다며 명진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오열했던 사연을 전하며 존경심을 표현했다.

khj3330@xportsnews.com / 사진= MBC 방송화면

김현정 기자 khj3330@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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