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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신들린 무등산 폭격기

기사입력 2006.02.24 21:55 / 기사수정 2006.02.24 21:55

윤욱재 기자

팬들의 사랑 속에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뤄 온 한국프로야구가 어느덧 25년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로야구는 수많은 경기들을 통해 팬들을 웃고 울리는 동안 불세출의 스타들이 탄생하였고, 또 그것이 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엑스포츠 뉴스에서는 윤욱재 기자를 통해 스타 선수들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철순부터 손민한까지 '그 해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중심으로 집중 조명합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7] 1986년 선동열


대한민국 에이스의 역사적 출발


선동열은 1985시즌에 데뷔한 프로 2년차였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86시즌이 풀타임 첫 해였다.


선동열의 입단 과정을 살펴보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동열은 해태와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해태에 염증을 느끼고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덜컥 계약을 체결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실업 선수가 프로에 가려면 2년을 아마추어 무대에서 뛰어야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이 바뀌면서 선동열은 다시 해태와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계약금 1억 3,800만원, 연봉 1,200만원에 입단을 확정지었다. 물론 대한야구협회와 한국화장품의 반발이 있었지만 KBO와 해태가 타협에 나서면서 선동열의 프로 입성이 현실화될 수 있었다. 단, 6월말까지 출전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선동열의 프로 데뷔를 미뤄놨고 선동열은 후기리그에만 뛰면서 방어율 1.70 7승 4패 8세이브를 거두며 방어율 1위를 거두지만 신인왕을 거머쥐는 데는 실패했다. 비록 인상적인 데뷔는 아니었지만 선동열과 방어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확인시켜주었던 루키 시즌이었다.


선동열의 입단을 그토록 기다렸던 해태 팬들은 이제 우승만 남았다며 86시즌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해태는 이 때 트레이드로 영입한 한대화를 어렵게 합류시키고 차동철, 김정수 등 쏠쏠한 신인들이 입단하며 상당한 전력보강이 이뤄진 상태였다. 여기에 선동열의 기량이 만개한다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0점대 방어율, 아트 피칭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빠른 볼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고 변화구를 잘 던지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자기 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유연성이다. 선동열은 타고난 유연성을 바탕으로 최고시속 156km의 강속구와 현란한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었다. 딱 하나 불만이 있었다면 손끝과 중지 사이가 18cm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평균 성인 남자와 비슷한 수치(數値)다.


비록 타고난 손을 가지진 않았지만 선동열은 몸의 유연함과 강한 승부욕으로 리그를 지배할 수 있었다. 선동열은 그냥 이기는데 만족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무실점 혹은 1~2점만 내줘야 직성이 풀렸다. 이것은 방어율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 선동열은 누구보다 방어율을 사랑했다. 86시즌부터 91시즌까지 7시즌 연속 방어율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었음은 물론 0점대 방어율을 3번이나 기록했으니 방어율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방어율은 0점대는 9이닝동안 평균 1점도 채 내주지 않는다는 뜻. 제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도 감히 정복하기 힘든 고지였다. 그러나 선동열은 가능했다.


결국 0.99란 전인미답의 기록을 남긴 선동열은 MVP 수상은 물론 다승, 방어율 타이틀을 차지하며 ‘선동열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줬다. 당시 최동원, 김시진 등으로 대표되던 프로야구 마운드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승률 타이틀을 놓침으로 인해 투수 3관왕이 무산된 것이다. (당시 탈삼진 부문 타이틀을 따로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승, 방어율, 승률이 그 조건이었다.) 승률 1위를 놓고 다투던 최일언(OB)이 시즌 마지막 경기인 롯데전에 등판, 1-3으로 패색이 짙었지만 9회말 OB가 극적인 뒤집기로 4-3 역전승을 따내면서 승률 타이틀을 가져간 것. 이 경기로 인해 선동열의 투수 3관왕 무산은 물론, 최동원의 3년연속 20승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해태 신화, 그 출발선에 서다


해태는 전후기 모두 2위를 마크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수 있었다. 85시즌 도입된 종합승률제가 1년 만에 폐지되면서 새로 만든 제도 덕분이었다.


종합승률제의 변환 (1986년부터 시행)
▶ 
전기리그 1, 2위와 후기리그 1, 2위 중 한 팀이 두 가지에 해당한다면 한국시리즈에 자동 진출하고 나머지 팀들은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 전기리그 1, 2위와 후기리그 1, 2위가 모두 다르다면 서로 크로스 토너먼트로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 진출팀을 가른다.


지난해 한국시리즈가 무산되자 어떻게든 한국시리즈는 거행해야한다는 여론 때문에 만든 새로운 규정은 결국 해태를 위한 선물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제도도 허점이 있었다. 전기리그 1위 삼성과 후기리그 1위 OB는 ‘2위팀’ 해태가 여유롭게 기다리는 가운데 플레이오프를 치러야했다.


해태는 OB와 혈전을 치르고 올라온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맞닥뜨렸고 1차전 선발로 선동열을 내세웠다. 에이스가 1차전에 나서는 건 당연했다. 삼성은 ‘에이스 피해가기’ 전략으로 진동한을 내보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승부는 팽팽하게 진행됐다. 선동열은 김성래에 투런홈런을 내줬고 9회에도 추가 실점을 하면서 3점씩이나 내주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9회말 어렵사리 따라붙은 해태가 결국 연장 접전 끝에 4-3으로 승리, 패전은 면할 수 있었다.


4차전에 다시 기회를 잡은 선동열은 전날 해태 구단버스 방화사건으로 다소 삼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경기에서 1-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6회말 2점을 내준 채 마운드를 떠나야했다. 자존심 상하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5차전에 6회 구원등판, 4이닝 동안 탈삼진 8개를 곁들여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우승 헹가레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것이 4년연속 우승의 출발점이었다.


우승의 기쁨도 컸지만 그것도 잠시, 선동열을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지루한 연봉협상. ‘임의탈퇴 소동’까지 벌이며 한 해를 넘긴 협상은 결국 KBO의 중재 끝에 타결됐지만 선동열과 해태 모두 지쳐버리고 말았다. ‘수퍼스타’는 협상 과정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


선동열 (1986) 24승 6패 6세이브 방어율 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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