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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준족의 대명사 박재홍과 이병규

기사입력 2005.11.29 01:36 / 기사수정 2005.11.29 01:36

유재한 기자


[호타준족의 대명사 박재홍 이병규]

감독이 선수를 뽑을때 가장 중요시하는건 무엇인가?  타자라면 타력 주력 정신력 선구안 파워 등이 있다.  

위에 말한 여러가지의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되는 한국프로야구의 두 거인 이병규(LG)와 박재홍(전 SK)를 살펴보기로 한다.

[NO.62 '리틀쿠바' 박재홍 과 NO.9 '적토마' 이병규의 화려한 데뷔]

1973년 생으로 광주제일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96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박재홍은 데뷔 첫해부터 화려하게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전 클린업트리오에서 활약했던 박재홍은 클린업 트리오에서의 활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국내선수론 최초로 30-30클럽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이에 팬들은 그에게 리틀 쿠바라는 애칭까지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1996년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골든 글러브수상을 수상, 사상최초로 만장일치로 신인상을 수상하는 기쁨까지 누렸다. 역사상 이렇게 강력한 신인 타자는 없었다는 찬사를 들으며 박재홍의 프로생활은 화려하게 시작 되었다.

1974년 생으로 장충고와 단국대를 졸업하고 97년 4억4천계약금을 받고 박재홍보다 1년 늦게 프로에 뛰어든 이병규는 입단할때 부터 '한국의 이치로'라 불리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야구센스는 우리나라에서 누구도 따라 올수 없다는 재능을 가진 이병규는 데뷔 첫해 전 경기에 출장하여 151안타를 기록하며 타율 3할5리를 기록하며 박재홍에 이어 화려하게 프로 첫해를 시작했다. 게다가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역시 골든글러브에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들은 데뷔때부터 비슷한 점을 많이 보였다.

[리틀쿠바와 적토마의 화려한 질주]

국내 최초 30-30에 가입하며 화려하게 시작한 박재홍의 프로 생활은 거침없었다. 이듬해에 20-20에 가입했으며 정확한 타격을 선보이며 타율도 .326을 기록했다. 그리고 98년에는 또 한번 30-30클럽에 가입했으며 10월에는 LG와의 한국시리즈를 맞아 LG를 4승2패로 누르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꿈에 그리던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2000년 또 한번 30-30클럽에 가입하며 1번하기도 힘들다는 30-30클럽에 세번이나 가입하며 역사상 오래도록 기록 될 선수로 남게되며, 두 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게되며 한국프로야구사에 자리 잡게 된다.

이에 질세라 이병규 역시 화려한 질주를 계속 하고 있었다. 98년 이병규는 팀을 한번더 한국시리즈에 올려놨지만 박재홍이 이끄는 현대에 2년 연속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병규를 더욱 더 불타오르게 했을까?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그친 다음 1999년 이병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타자로 남을수 있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타율.349 192안타 30홈런 99타점 30도루를 기록하며 30-30클럽에 가입하며 박재홍에 버금가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특히 펜스거리가 먼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로서 30개의 홈런은 왠만한 파워타자가 아니면 기록하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99시즌 전까지 통산홈런이 16개에 불과하던 이병규는 99시즌을 자신의 최고로 해로 만들었고, 그동안 김재현, 서용빈등에게 가렸던 LG간판 자리를 자신 앞에 가져오며, 전국적으로 이병규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상과 불화.. 그리고 시련]

꾸준한 활약으로 거침없는 커리어를 기록해 가던 박재홍과 이병규. 그들 앞에도 시련은 있었다. 박재홍은 2000년을 기점으로 타율과 안타 홈런 도루등 모든 부분에서 점점 낮아지는 수치를 기록했고, 이에 현대는 박재홍을 2002시즌이 지난 후 기아의 정성훈과 맞트레이드 하였다.  고향팀으로 돌아간 박재홍에게 팬들은 제2의 신화를 써나가길 기대했다.

하지만 기아에서 생활은 그에게는 잊고 싶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이적 첫해는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도 제 역할을 했으나, 2년째는 부상에다가 감독과의 마찰등으로 인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을 성적을 냈다. 이에 트레이드를 요구한 박재홍은 2005시즌을 맞아 제2의 고향이라고 할수 있는 인천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미 옛날의 기량을 상실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이병규 역시 99년 맹활약을 한뒤 전국구 스타가 되며 적토마의 커리어를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3년 연속 최대안타왕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2002년 이병규는 연봉조정한파 때문이었는지 전에 없던 지독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항상 클린업트리오 혹은 1번에서 활약한 그의 타순은 수시로 바뀌었으며 99년이후 지켜오던 3할 타율도 기록하지 못했다. 이상훈이 복귀한 2002시즌 LG는 또 한번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으나 , 결국 삼성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에 무릎을 꿇으며 또 한번 더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2003년 이병규는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하며 44경기 출전에 그치며 박재홍과 마찬가지로 큰 시련을 겪는다.

[제2의 도약]

각각 부상과 불화등으로 고생을 했던 박재홍과 이병규. 그러나 이 들은 다시 도약 했다. 이병규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2004시즌 이병규는 주루플레이에서는 예전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타율.323에 160안타 14홈런 64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톱타자로서 좋은 활약을 했으며 2005시즌 최다안타왕 타이틀을 탈환했으며 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위타자상까지 수상하며 완벽 부활을 선언했다.

지옥 같았던 2004시즌을 마치고 2005시즌 제2의 고향이라고 할수 있는 인천으로 돌아온 박재홍 역시 팀에 소금 같은 역할을 해주며, 조원우가 빠진 톱 타자 자리를 메워주었고 국내 최초로 200-200을 기록하는등 다시 한번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화려한 데뷔와 시련, 그리고 부활. 한국프로야구 타자를 대표하는 그들의 계속 되는 신화를 기대해보는 것 역시 야구팬들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것이다.



유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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