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수비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카테나치오의 수장 파울로 말디니는 존 테리(첼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존 테리는 우수한 선수입니다. 그러나 솔 캠벨과 리오 페르디난드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세계 최고가 되려면 적어도 2-3년은 걸릴 것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그리고 9개월이 흐른 지금, 말디니는 자신이 내뱉은 이 말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정상급이 되려면 멀었다는 존 테리(첼시.25)가 소속팀인 첼시의 1위 질주를 든든하게 후원하며 최고 수비수인 리오 페르디난드의 아성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까지 존 테리는 호세 무링요 감독의 극찬과 지지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확실한 주전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의 수비수인 리오 페르디난드가 버티고 있었고, 경쟁자들에 비해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솔 캠벨의 수비력은 여전히 세계 정상급이었다.
하지만,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는 센터백이 누구냐?" 라는 질문이 던져지게 된다면 존 테리의 존재감으로 인하여 선뜻 그 답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가능성 있던 유망주에 지나지 않았던 존 테리는 어느새 그만큼 성장해 버렸다.
주말 리버풀전,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 존 테리지난 2일 펼쳐졌던 EPL, 리버풀과 첼시의 경기는 존 테리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리버풀과 맞선 첼시는 전반에 드로그바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프랭크 램파드가 성공시키며 쉽게 경기를 가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리버풀의 제라드가 멋진 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가져가 원정팀인 첼시로서는 불안해졌다. 연승에 대한 부담감도 그렇지만, 원정이라는 불리함과 압박이 더 그랬다.
동점골을 성공시킨 리버풀은 더욱 강하게 조여왔고, 순간 첼시는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첼시에게는 존 테리가 버티고 있었다. 존 테리는 이 날 경기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수비 리드와 클리어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리버풀의 공격 의지를 꺾어 놓았다. 이 날 존 테리가 문전 앞에서 상대 크로스나 킬 패스를 클리어해 낸 장면만도 십 수차례나 된다.
그야말로 공이 날아오는 곳엔 존 테리가 있었고, 리버풀로서는 거대한 장막과 같이 가로막고 서있는 존 테리를 끝내 뚫지 못했다. 결국, 존 테리가 리버풀의 창을 무디게 하면서 첼시는 3골을 더 추가하며 4-1의 완승을 거두었다.
첼시는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8전 전승을 내달리며 승점 24점을 획득,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찰튼과 토트넘(승점 15점)에게 무려 9점이나 앞선 1위를 달리고 있다. 아직 리그 초반인 점을 가만하면 첼시는 정말 고속질주 중이다.
경기당 2.25골을 성공시키는 공격력도 무섭지만, 더욱 첼시를 넘기 힘든 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역시 존 테리가 버티고 있는 수비라인의 견고함이다. 첼시는 시즌 8경기에서 단 2실점을 기록하고 있다. 공격적이기로 유명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첼시가 기록하고 있는 2실점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기록인 셈이다.
물론 첼시가 지난해보다 한 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쾌속질주를 하고 있는 것은 호세 무링요 감독의 지도력과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영입한 선수들의 활약도 크다. 하지만, 첼시 유스팀에서부터 성장해온 존 테리의 존재는 지난해보다 더욱 커졌고, 그가 지키는 첼시의 골문 앞은 더욱 튼튼해졌다.
존 테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중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예측 능력'이다. 존 테리는 상대의 공격 루트나 패스 방향 그리고 상대 공격수의 드리블의 방향까지 미리 예측해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힘겨운 몸싸움이나 경합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냄으로써 쉽고 간결한 수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세 무링요 감독이 리버풀전을 앞두고 "우리는 앞으로 리버풀에 단 한 골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 했던 것도 바로 존 테리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호언장담은 제라드로 인해 보기 좋게 깨졌지만, 결국 존 테리가 첼시의 승리를 지켜낸 것에 대해서는 리버풀의 베니테즈 감독도 이의를 제기하진 못 할 것이다.
이제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수비수에서 최고의 수비수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존 테리, 솔 캠벨과 리오 페르디난드를 넘어 프리미어리그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넘버 원' 센터백이 될 날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손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