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3.24 19:10 / 기사수정 2009.03.24 19:10
[엑스포츠뉴스 = 이동현 기자] 모두 피하려 했다. 저마다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 결론은 '못 하겠다'로 같았다.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팀 사령탑은 다들 꺼리는 자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국민의 한국 야구에 대한 기대치는 정점에 올랐다. 올림픽에서 9전 전승이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을 냈으니 WBC에서도 비슷한 성적을 기대하는 건 일반적인 심리였다. 올림픽 사령탑 김경문 감독은 재빨리 발을 뺐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김성근 SK 감독도 한발 물러섰다. 감독 선임에서부터 이런저런 잡음이 흘러나오자 1회 WBC의 영광을 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그때 김인식 감독이 나섰다. 김 감독은 2006년 1회 대회때도 사령탑을 맡아 한국을 4강에 올려놓으며 '국민감독'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김인식 리더십'이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해태와 삼성에서 통산 10번의 우승을 진두지휘한 김응룡 전 감독(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리더십을 다룬 책이 화제가 되던 시기였다. 곧 김인식 리더십을 주제로 한 단행본도 나왔다. WBC 1회 대회를 통해 김인식 감독은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 사령탑 자리는 성공했을 때 얻을 것보다 실패했을 경우 잃을 것이 더 많은 위치였다. 이미 명장 반열에 올라 있는 김인식 감독에게는 더욱 그랬다. '국가'를 강조하며 감독직을 수락한 그의 결단이 더욱 위대해 보였던 이유다. 떠맡겨지듯이 오른 감독 자리였지만 결과적으로 김인식 감독은 또 성공을 거뒀다. '역시 국민감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선수 구성은 김 감독의 의도대로 안 됐다. 이승엽, 박찬호, 김동주가 일찌감치 불참 의사를 밝혀 왔고, 김병현과 박진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애를 태우다 결국 빠졌다. 남은 선수들로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다들 의심스러워했다. 김인식 감독은 엔트리의 빈자리를 자신의 입맛대로 채웠다. 지명도에 앞서 '쓰임새'를 보고 선수를 골랐다.
김인식 감독은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귀신 같은 용병술로 승리를 쌓아나갔다. 2루수 정근우를 경기 도중 고영민으로 교체해 쏠쏠한 재미를 봤고, 더블 스틸, 위장 번트 등 고난도의 작전들이 척척 들어맞았다. 이종욱 대신 이용규를 주전으로 내세운 승부수도 멋지게 통했고, 이대호를 3루에서 지명타자로 내리고 그 자리를 이범호에게 맡긴 결단은 뚜렷한 전력 상승효과를 냈다.
타격 부진에 시달린 박경완에게 대회 내내 신뢰를 보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경기 중반에 박경완에게 찬스가 걸려도 김인식 감독은 대타를 내보내는 대신 눈을 질끈 감고 뒷일을 도모했다. 당장 1점을 얻는 것보다 박경완의 투수 리드 능력을 경기 끝까지 써먹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쉬워 보여도 아무나 할 수 없는 판단이다. 득점 찬스를 살리기 위해 박경완을 뺀 경기는 결승전 한번뿐이었다.
베네수엘라와의 준결승전에 추신수를 '깜짝 기용'한 것은 신들린 용병술의 결정판이었다. 2라운드까지 내내 부진하던 추신수는 1회초 장쾌한 중월 3점 홈런을 쏘아 올렸다. 김인식 감독은 타격감이 살아난 추신수를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5번 타자 우익수로 기용했다. 추신수는 5회말 동점 솔로 홈런을 터뜨렸고, 7회초에는 아오키의 2루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로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김인식 감독의 결단력과 뚝심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김 감독은 2006년 3월 WBC 1회 대회를 잘 치른 후 그해 가을 소속팀 한화를 한국시리즈에 끌어올리며 잊지 못할 1년을 완성한 바 있다. 이제 한화 감독으로 돌아간 김인식 감독이 올해 가을에는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지 관심거리다.
[사진(C) WBC 공식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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